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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이 42.195km가 된 이유는?

기사입력 2006.08.28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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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톤[marathon] 


    마라톤이 42.195km가 된 이유는?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올림픽 대회가 다시 열리게 되었을 때 처음 실시되었다. BC 490년 아테네가 페르시아를 물리쳤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약 40㎞에 이르는 거리를 달렸다는 한 그리스 병사의 전설적인 위업을 기리기 위해서 마련되었다. 1896년에 벌어진 최초의 근대 마라톤 대회의 우승은 그 취지에 걸맞게 그리스의 스피로스 루이스가 차지했다.


    1924년 올림픽 대회의 마라톤 경주거리가 42.195㎞로 확정되었다. 이것은 1908년 올림픽 대회 때 마라톤 경주를 윈저 궁에서 출발하여 런던 스타디움 로열박스 앞을 결승선으로 하겠다는 영국 올림픽 위원회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마라톤 코스는 난이도가 똑같지 않기 때문에, 국제 육상경기연맹에서는 이 종목에 대한 세계기록을 일람표로 만들지 않는다. 올림픽 대회 우승 다음으로 마라톤 선수들이 탐내는 것은 1897년부터 해마다 열리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의 우승이다. 세계 각지의 선수들이 이 대회에 참가했지만, 1945년부터는 주로 캐나다·일본·핀란드 선수들이 우승을 했다. 이밖에 뉴욕 마라톤 대회와 시카고에서 열리는 아메리카 마라톤 대회는 미국에서 인기있는 대회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콤레즈 마라톤 대회는 86㎞ 코스에서 벌어진다. 한 해는 더반에서 출발하여 피터마리츠버그까지 달리고, 이듬해에는 피터마리츠버그에서 더반까지 달린다. 가장 뛰어난 만능 육상선수인 아서 F. H. 뉴턴은 39세 때인 1922년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했다. 여자선수들이 공식적으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것은 1970년대초부터였으며, 경기수준의 전반적인 빠른 성장은 주목할 만하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대회 전에 규정된 경주거리를 달려보는 훈련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오랫동안 뿌리박혀 있었다. 그러나 1952년 올림픽 대회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에밀 자토페크는 그 이전에 규정된 경주거리를 한번도 달려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시간 23분 03초 20으로 올림픽 대회 신기록을 세우면서 우승을 했다. 한편 에티오피아의 아베베는 1960년 로마 올림픽 대회와 1964년 도쿄 올림픽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2연패를 기록했다. 특히 도쿄 올림픽 대회에서 그는 당시 최고 기록인 2시간 12분 11 초 20을 기록했다. 현재 최고 기록은 에티오피아의 벨라이네 딘사모가 기록한 2시간 06분 50초이다(→ 스포츠 기록 : 육상, 올림픽 대회).
     
    [한국의 마라톤]


    한국 최초의 마라톤 대회는 1920년 조선체육협회 주최로 열린 경성일주 마라톤 대회로서 당시 대회 우승자는 최홍석(崔洪錫)으로 2시간 11분 27초를 기록했다. 이 대회를 시작으로 마라톤은 급속히 발전했다. 1929년 일본의 간사이[關西]대학이 주최한 제5회 한성역전 마라톤 대회에서 양정고등보통학교가 일본 팀을 물리치고 우승했으며, 1931 년 고려육상경기회 주최로 열린 제1회 경성-영등포간 왕복 마라톤 대회에서 김은배(金恩 培)가 1시간 22분 05초로 1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 10월 조선신궁대회(朝鮮神宮大會)에서는 김은배가 2시간 26분 12초로 당시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면서 우승을 했다.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에서 김은배는 2시간 37분 28초로 6위, 권태하(權泰夏)가 2시간 42분 52초로 9위를 기록했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는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일본 국기를 달고 참가해 올림픽 대회 신기록인 2시간 29분 19초 20으로 우승을 차지했으며, 남승룡(南昇龍)이 2시간 31분 42초 20으로 3위를 차지하는 등 한국 마라톤 역사상 기념비적인 대회였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우고 사진을 게재해 민족의 단결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일장기말소사건).


    8·15해방이 되면서 그해 9월 23일 조선육상연맹이 발족되었으며, 1947년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서윤복(徐潤福)이 출전하여 2시간 25분 39초로 우승을 차지했다. 1950년 제54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함기용(咸基鎔)·송길윤(宋吉允)·최윤칠(崔輪七) 선수 등이 각각 1·2·3위를 차지해 마라톤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유감 없이 발휘했다. 1952년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대회에서는 최윤칠이 4위, 1958년 멜버른 올림픽 대회에서는 이창훈(李昌勳)이 4위, 1958년 5월 제3회 도쿄[東京]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이창훈이 1위를 차지했으나 그 이후 침체기에 빠졌다. 그후 1982년 제9회 뉴델리 아시아 경 기대회에서 김양곤(金梁坤)이 1위, 이듬해 해밀턴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이홍열·김종윤이 각각 1·2위를 차지했으나 세계기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마라톤은 그후 동아 마라톤 대회를 비롯한 국내 주요대회 등을 통하여 중흥을 꾀했다. 1984 년 3월 제55회 동아 마라톤 대회에서 이홍열이 2시간 14분 59초, 채홍락이 2시간 15분 16초를 기록했으며, 1986년 3월 제57회 대회에서 유재성이 2시간 14분 06초로 한국신기록을 수립했고, 1987년 제58회 대회에서 이종희가 2시간 12분 21초를 기록했다. 1991년 11월 3일 조 일(朝日) 마라톤 대회에서 김완기(金完基)가 2시간 11분 02초, 1992년 2월 2일 일본 규슈[九州]의 벳푸[別府]-오이타[大分] 간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황영조(黃永祚)가 2시간 08분 47초의 기록으로 2위를 차지하여 종전 기록을 2분 15초나 단축한 한국신기록을 수립하며 10분대 벽을 돌파했다. 또한 황영조는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회에서 2시간 13분 23초로 손기정이후 56년만에 다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한국 마라톤을 세계에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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