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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淸海鎭)시대 정년장군

기사입력 2016.03.24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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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보고의 뒤를 이어 계속 청해진 대사 [청해진농수산경제신문] 정년(鄭年)은 통일신라 말기의 무신으로 궁복(장보고)와 함께 청해진(완도)를 지켰다. 
     
       
    장보고(張保皐)와 정년은 다 싸움을 잘했는데 정년(鄭年)은 바다 밑에 잠겨서 50리를 가도 숨이 막히지 않다는 전설적인 사람이었다
    그 용감하고 씩씩함을 견주자면 장보고가 못하였으나 정년이 장보고를 兄으로 불렀다.

    장보고는 나이로, 정년은 재주로 항상 맞서 서로 낮추지 않았다.
    그때부터 완도사람들 물속길 50리를 끼우는 존재로 육지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정년은 장보고(張保皐)와 함께 당나라(唐)에 건너갔다
    당나라에서 정년과 장보고는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었는데 말타고 창을 쓰는 데 있어서 맞설 자가없었다.
     
    그들은 해적에게 납치되어 당나라에서 고생하고 있는 신라사람들을 석방 시키는데 기여 하였다.
     
    당시 황해에서 날뛰던 해적들로 부터 모국 신라(新羅)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것을 보고 장보고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신라 조정을 설득, 전남 완도의 청해진(靑海鎭)을 근거로 해적들을 소탕하고
    서해, 남해항로의 무역권을 독점하게 되자 정년장군도 뒤따라 귀국, 장보고를 도왔다.
     
    귀국 후 흥덕왕조에 출사하여 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정년은 본관이 경주이고 신라의 개국공신 지백호의 후손으로, 어린시설 궁복이(장보고)와 함께 청해진 완도에서 살았다 .
     
    그는 청해진에 몸을 의탁한 아찬(阿燦) 김우징을 받들었고. 838년(민애왕 2) 장보고(張保皐)의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아찬 김우징(金佑徵: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 김명(金明)의 관군을 무찌르고 신무왕(新武王)을 세우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장보고의 자녀가 문성왕과의 결혼 문제로, 문성왕이 보낸 자객 염장에게 장보고가 암살되자
    이후 혼란에 빠진 청해진(淸海鎭)을 수습하고 장보고의 뒤를 이어 계속 청해진 대사로서 청해진을 지켰다.
    장보고장군의 정치력과 정년장군의 무술로서 둘이가 하나되면 언제나 무적이 되었다고 한다.<서부 정완봉기자>

    새감각 바른언론-청해진농수산경제신문www.chjnews.kr
    입력16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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