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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칼럼- 교회여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자청해진칼럼 교회여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자 서해식 도민 편집장 경북 안동에 거주하면서도 진보적인 시각으로 항시 약자편에 섰던 동화작가 고 권정생 선생은 민들레와 다람쥐와 강아지가 마냥 좋았답니다. 동화 강아지똥" 등 많은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인세로 벌어들인 돈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는 가난하게 토담집에 살았습니다. 자연환경을 생각하여 자가용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문학상을 주겠다하면 펄펄뛰고 거절했다는 분입니다. 그가 돌아가신 후 발견된 통장에는 10억이란 거금이 있었고 유서에는 북한 어린이들에게 사용하라고 써있었다는 것입니다. 고신대학 의과대학을 세우고 한국의 슈바이쳐로 존경받은 장기려 박사님은 인생말미에 기성교회를 떠나 복음모임으로 불리운 가정교회로 옮겨가고 기득권을 버렸던 것은 요한123서를 수없이 읽고 내린 결과였다고 합니다. 사랑과 용서가 구원이 조건임을 알았고 형제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는 말씀에 주목했다고 합니다. 최첨단 미국에서 18세기식의 생활을 고수하고 있는 아미시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왜 새삼스럽게 주목을 받을까요. 전기도 자동차도 거부하고 우마차를 타며 촛불을 켜고 자연을 사랑하는 그들의 절제된 삶은 너무나도 숭고하답니다. 지난 연말에 발표된 모 여론조사 기관의 한국교회 신뢰도가 충격을 주었습니다. 천주교 불교보다 못한 기독교에 대한 대 국민 이미지가 많이 실추되어 있었습니다. 한때 거침없는 성장을 해왔지만 교세는 주춤하고 안티들의 거센 도전앞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음을 봅니다. 대형교회들이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이던 삼일교회 전 모목사가 스캔들에 견디다못해 사임을 선언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목동 제자교회의 모 목사는 횡령사건에 연루되어 법정공방이 치열하더군요. 대통령님이 출석하는 강남 소망교회는 담임 목사와 부목사들과 폭력사태가 발생하여 세간의 이맛살을 찌뿌리게 했습니다. 이른바 부자교회로 이름나 부목사들이 교구목사가 되어 심방을 가면 자동차도 선물받고 몇백만원의 촌지도 받는다는 교회로 이전투구가 이해될만합니다. 구 은퇴목사측과 새 담임목사측과의 파워게임이라는 시각도 있어 보이고요. 호남의 대표주자 교회였던 광주 J교회의 두목사가 따로 예배보기 분란은 예수정신이 실종된 이상 악순환은 계속될 것입니다. 얼마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 현 이영훈 목사님을 음해하는 전단이 수없이 뿌려지고 배후세력이 강남 모교회 김모목사라고 합니다. 김모목사의 누나가 모대학교의 총장이랍니다.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비칩니다. 현실교회가 신약에서 제시한 교회모형에서 많이 이탈된 듯 보입니다. 전도전략이 최우선시 되어 양적 성장만을 최고선으로 치부하나봅니다. 그래도 들어온 숫자보다 나가는 숫자가 더많을듯합니다. 수십억을 들여 상가지역에 교회당을 짓고 버스를 사들여 시골교회 신도까지 빼앗아가는 풍토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고급아파트 사택과 고급 승용차에다 많은 사례비(월급)를 받는 일명 큰 교회목사님! 미자립 도서벽지 교회의 실상을 아시는 지 모르시는 지, 돈이 없어 애들 교육비는 커녕 살기힘든 도서벽지 목회자들입니다. 큰교회 목사님의 고급자가용 일주일만 세워놓고 연료비 아끼면 수십만원이니 그 돈만이라도 지원만해도 도서벽지 미자립교회는 풍족하지는 못해도 숨이라도 쉬겠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지극히 낮은 마굿간 구유에서 탄생하신 그 크신 섭리를 잊어버리시지는 않았겠지요, 큰 교회목사님!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자연의 섭리처럼 재정이 풍부한 교회에서 재정이 열악한 미자립 도서벽지교회 지원에 월5만원 아니 월10만원정도 지원하면서 국내 선교한다고 자랑하는 거 말이나 됩니까. 어느 교회서 중국에다 러시아에 선교한다니 서로 경쟁이나 하듯 수천만원의 돈을주는 식의 해외선교는 하나님이 과연 잘했다 칭찬할까요. 너희 가까운 이웃 미자립교회를 도와주는 것을 하나님이 칭찬할까요. 성경의 본질을 왜곡하는 배부른 교회에서 배고픈자의 심정을 알지는 못하겠지만요. 지금 우리 관내지역도 목 좋은 위치 큰 교회당 드넓은 주차장이 부흥의 원동력이라고 합니다. 재정이 넘쳐나고 배가 부르면 돈과 종교권력과 섹스에 취약하게 됩니다. 얼마전에 평화방송에서 동정부부"라는 타이틀의 역사극을 감상했습니다. 210년전의 이야기입니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유종철 (요안)과 이순이(루갈다) 부부의 스토리였습니다. 동정부부로 살아가면서 극기와 절제로 순결하게 살아가는 과정과 박해시대에 철저한 신앙생활이 유난히도 시선을 끌었습니다. 성 개방풍조가 가정파괴로 이어지는 문란한 시대에 그들은 샛별과 같이 빛이었습니다. 우리개신교는 가톨릭에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상충된 교리를 떠나서 말입니다. 유교가 덕목인 조선시대에 도래된 가톨릭은 사교로 인정되어 엄청난 박해와 시련을 겪었고 많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145년전에 한강에서 목을 베어 순교당한 절두산 그 자리에 지금 절두산성당이 서있습니다. 무수한 가톨릭신자가 잡혀와 순교당한 현장에는 피가 흘러 한강이 피로 물들었다고 합니다. 가톨릭이 뿌려논 순교의피가 한국땅에 오롯이 복음의 꽃을 피어나게 했다고 봅니다. 지금은 미스미디어시대입니다. 안방 채널을 돌리면 개신교 채널도 가톨릭채널도 불교채널도 마음대로 선택하여 시청합니다. 기독교채널 사이에 평화방송이 있습니다. 대비하여 보게 됩니다. 기독교는 입만 살아있는 말잔치가 지나친 듯합니다. 방송을 보고도 가톨릭을 선호할 듯 보일 때 가 있답니다. 이젠 교회는 복음의 본질을 회복할 때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천사의 말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데요. 요한계시록 2장5절의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새감각 바른언론-청해진신문 www.wandonews.kr입력 2011013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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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내기교회 노인대학, 노인들 건강센터강진 내기교회 노인대학, 노인들 건강센터 노인 학생 4년 사이 7배 늘어 150명 ▲ 강진내기리 노인대학 강진군 작천면의 내기교회가 농촌지역 노인들에게 한글반, 노래반, 만들기반을 운영하며 중식제공과 목욕 및 미용 봉사활동 등 연로한 어르신 섬기는 일을 4년째 하고 있다. 강진군 작천면 내기리 노인대학(학장 김향자 목사)에 지난 2월5일 본지 취재팀이 찾아 갔을 때 국민일보를 보고 왔다는 전라북도의 남자 목사님이 무용을, 완도에서 온 레크리에이션 자원봉사 지도자 최미영(안디옥교회)씨의 노래교실에 이어 노인대학생들에게 중식으로 교회에서 정성껏 준비한 추어탕이 제공됐다. 내기교회가 마을회관이나 노인정 등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노인대학을 처음 개설한 것은 지난 2007년으로 김 목사는 점심식사에 항상 영양가 높은 식단을 구성해 노인학생의 건강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 노인대학에서는 한글을 모르는 노인들을 위한 ‘기초 한글 공부반’을 비롯해 치매예방을 위해 종이접기나 퍼즐 맞추기 등을 하는 ‘만들기 교실’, 취미생활을 위한 ‘노래교실’ 등을 매주 금요일 열어 운영하고 있다. 한글교실과 만들기, 레크리에이션 등은 모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광주나 완도 등지의 자원봉사자들이 1주일에 한 번씩 찾아와 맡고 있다. 노인들은 이들 자원봉사자에게 항상 고마움과 수고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고구마 등을 갖고 와 정을 나누곤 한다. 광주에서 찾아오는 한글공부반 교사 천성은(월광교회 권사, 사회복지사, 보육교사)씨와 만들기 지도사 박금진(사회복지사, 보육교사)씨는 “노인들이 매주 금요일을 항상 기다리고 있다”며 “수업에 빠지지 않기 위해 농사일도 금요일을 피해 할 정도”라고 말했다. 이 노인대학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모두 받아들이고 있다. 개교 첫해에는 작천면 내기리 인근 마을에서 20여명에 불과하던 노인 학생이 지금은 작천면 내 20여개 마을, 150명으로 무려 7배 이상 늘어났다. 이들 중 70% 정도가 기독교인이 아니다. 교회가 세운 노인대학이 지역 공동체를 형성, 노인들을 위한 소통과 교육 그리고 건강센터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1965년 5월 문을 연 작천 내기교회 주일 성도는 현재 60여명이다. 김향자(53·여, 한국기독교장로회 내기교회)목사는 “주민들이 하나님을 믿어야 교회에 올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누구나 편안 마음으로 찾아와 건강한 삶을 위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며 내기교회 노인대학은 모든 주민에게 문을 활짝 열어놓은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만남의 장소라고 말했다.<石泉 김용환 대표기자> 새감각 바른언론-완도주간신문 청해진 www.wandonews.kr 입력20100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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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한국교회 설교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특별기고 - 정장복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한국교회 설교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설교사역의 위기요소 분석과 그 대안의 모색▲정장복 총장(한일장신대학교) ▲ 정 장 복 교수 -한일장신대 총장 서언: 백년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느꼈던 감격과 새로운 다짐들은 벌써 시들기 시작하여 그 함성과 발길을 찾기 힘들다. 교회의 갱신이 필연코 있어져야 한다는 젊은 결단들은 다 시들어져가고, 오히려 교회의 무기력이 이 땅위에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도덕성의 퇴보와 윤리의 실종현상은 이 민족의 25%를 점유하고 있다는 기독교의 무기력함이 얼마나 극심한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시대의 정신세계는 언제나 물질문명의 발전과 반비례한다. 과학의 기술과 경제적 발전이 거듭되는 세계일수록 그 땅의 엄격했던 도덕성과 정신적인 전통성은 퇴색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우리의 한국의 세계도 예외가 되지 못한 채 심각한 진통을 앓고 있다. 특별히 이 땅의 엄격한 유교의 윤리사상과 접목되어 활발하게 행군을 계속했던 우리의 기독교는 어느 시대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심한 딜렘마에 빠지기 시작한다. 이 땅의 교회의 구성원들도 평범한 시민으로서 삶의 향상과 현대의 문명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타당한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설교자도 이 시대에 사는 인간이기에 문명의 이기(利器)를 십분 활용하면서 현대의 특권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적으로 시들어져 가는 설교사역의자의 고유한 정신(Ethos)과 사려 깊은 노력의 결핍이 문제이다. 즉 청교도의 신앙에 뿌리를 두고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던 소명의 다짐과 거기에 따르는 설교자의 철저한 생활에 너무나 심한 변화가 일고 있다는 문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종으로서의 그 고결한 땀과 눈물이 서서히 식어져 가고 이 시대의 혼탁한 물결에 휩싸이지 아니하려는 몸부림이 사라져가는 현실이다. 그러기에 우리 설교의 단에 불이 꺼져가고 있다는 지적이 일기 시작한다. 그토록 좋은 음향장치를 했고 화려한 장식이 가득한데도 오늘의 설교가 무기력하다. 이 민족의 가슴에 그 유창한 설교가 스며들지 못한다. 설교자를 통하여 전달되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외면을 당하고 있다. 좀더 솔직한 표현을 한다면 오늘의 교인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예배당을 찾아갈 수밖에 없으나 오히려 설교 때문에 깊은 실망을 안고 돌아오는 경우가 적지 아니함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설교학계에서는 [설교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진단을 내리게 되고 적신호를 켜게된다. 세계의 어느 교회에서나 발생했던 이러한 설교의 적신호를 보면서 자기점검을 했던 설교자는 살고 그렇지 못한 설교자는 설교의 몰락과 임종이라는 비극의 종점에 이른다. 2. 성찰을 요구하는 시대적 변화 회고해보면 한국의 기독교는 이 민족이 고통의 눈물을 흘리던 시절에 들어와 한 세기를 넘긴 종교이다. 이 땅에 기독교가 상륙하기가 무섭게 바로 이어진 한일합방의 민족적 비극이 발생되었다. 그때부터 식민지 교회로서의 울부짖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터지기 시작했으며, 순교를 부르는 핍박의 마수(魔手)가 한국교회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의 극심한 착취는 계속되어 이 땅의 가난은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비극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과 북으로 나누인 이 민족은 동족살상(同族殺傷)이라는 더욱 무서운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 했다. 이 무섭고 부끄러운 역사의 장이 끝나자 우리의 민족은 이 땅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갖은 노력을 기울였고 곧 등장한 군사정권과 함께 가난의 탈피를 가져오는데 함께 하였다. 그리고 터무니없이 등장하여 칼을 휘두른 정권이 인권을 짖밟을 때는 심각하게 저항하는 기록을 남기면서 [백담사의 귀향]이라는 희귀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사실 우리의 지난 한 세기는 한일 합방의 비극에서부터 80년대의 군사정치의 횡포에 이르기까지 숱한 변혁을 겪어야 했고, 때로는 잔혹한 삶에 시달려야 했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아픔의 역사는 어느 민족에게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교회는 어느 민족보다 강한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뜨겁게 주님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말씀에 깊은 뿌리를 둔 신앙의 불을 피우면서 그의 재림을 고대하였다. 한국교회의 한 사가(史家)는 이 때의 신앙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의 특징은 , 철저하게 내세적이요 현실 부정적이면서도 가혹할 정도로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생태에 접속하게 되어 있어서, 축복과 열복의 상징인 내세의 천국이 여기, 이 땅에서 그 종말의 아련한 대망의 자리에, 물리적으로 체험 가능하게 이르기를 줄기차게 갈망하는 데 있었다. 지난 한 세기를 돌이켜 보면 한국교회는 이상과 같은 연속된 불운의 늪에서 헤매이는 이 땅의 백성들에게 소중한 피난처이었고 도피성이었다. 그러기에 이 피난처에서 들려지는 말씀은 위로와 힘이 되었고 삶의 방향을 지배하는 막중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더군다나 그 말씀이 단순히 인간의 발상이나 지혜에 근본을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옷을 입었을 때 어느 누구도 감히 그 말씀을 향하여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오직 감사와 감격으로 일관하면서 눈물을 흘렀다. 그리고 거기에는 순종하는 길만을 걷기를 스스로 다짐하는 무리들로 행렬을 이었다. 자신의 건강에 이상이 와도 병원보다는 손쉽게 주의 종을 찾았고, 사업이 무너지는 아픔을 당하여도 예배당의 문전을 찾아 엎드려 기도를 드렸으며, 정치와 사회로부터 상처를 받아도 오직 말씀으로 위로 받기를 바라는 성도들로 예배당은 가득히 채워졌었다. 이러한 신앙으로 가득한 교회에서는 설교사역은 절대권위를 부여받게 되고 그 강단의 주역은 언제나 거룩한 권위와 반신적(半神的)인 존재로 군림을 한다. 그리고 메시지의 구성이나 전달에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고서도 특유한 음성과 태도와 영성의 권위만을 가지고서도 우뚝 솟은 교회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것이 교회사에 나타난 일반적인 현상이다. 바로 이때의 설교자는 쉽게 카리스마적인 존재로 등장하여 절대영향을 주는 위치를 쉽게 확보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설교의 준비를 위한 큰 부담 없이 자신의 경험이나 예화의 진열로 설교의 시간을 메꾸어도 아무도 그 설교자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교인들은 없게된다. 이러한 교회의 양태를 가리켜 흔히들 혼돈과 수난의 교회라고 이름하며, 설교자에게는 이러한 교회의 강단이 오히려 안일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도 모른 사이에 계속적으로 그 세계에 머물고 싶어하는 타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21세기의 문전에 도달한 오늘 한국 교회는 달라진 시대의 철로 위를 달리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달라진 세대가 교회의 주역들이 되었고 그 주역들의 눈과 귀는 과거의 것이 아닌 전혀 새로운 시대의 것이다. 어둡고 지루하고 눈물로 얼룩진 불행한 어제의 사연들을 경험하기를 거부하는 그들이다. 그들은 높은 교육수준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려한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비록 상대적 빈곤을 느끼는 경우가 있어도 그들은 스스로를 극빈자로 말하기를 거부하면서 중산층의 세계에 머무는 자신이라고 말하고 또 그렇게 희망한다. 비록 달동네의 삶을 지속하는 현실이더라도 고임금을 손에 쥐면서 내일에의 희망은 언제나 밝게 꾸며간다. 어둡고 비겁한 정치가들을 과감히 바꾸는 주권을 이제는 행사하면서 절대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지고 시(是)와 비(非)를 분별하는 능력을 행사하기 원한다. 뿐만 아니라 맹종의 신앙보다는 합리적인 신앙을 추구하기를 희망한다. 그들은 무식한 설교자보다는 지성적인 설교자를 원한다. 그들은 신선하고 창의적이며 역동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설교자 앞에서는 겸손히 고개를 숙이고 지루하고 아무런 변화도 없이 강단을 지키는 설교자에게는 경멸의 눈길을 보내는 모습을 서슴없이 나타내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눈길을 끌고 있는 것은 50년대와 60년대를 살아오던 세대마저 그토록 간절하게 지켰던 종말론적인 신앙들을 상실한 채, 먹고 살만한 오늘에 대한 애착이 대단히 깊은 상태이다. 이들의 신앙은 이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재림이 연기되기를 바라는 인간심성을 보이고 있다. 결국 이들도 과거 지향적이고 틀에 박힌 설교에 대한 환멸을 느끼면서 새로운 시대에 있어져야 할 신선한 설교자를 찾고 오늘의 수준을 이끄는 설교를 추구한다. 3. 한국강단을 침몰시키는 요소들 시대의 변천이나 개인의 발전이 어떤 단계에 이르든지 인간은 빵으로만 살수 없는 피조물임을 스스로 알고 한국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해서 아직껏 교회를 찾고 있다. 특별히 하나님 신앙은 그 표현에 있어서의 문제는 있었으나 "기독교나 천도교만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가 공유한 아득한 옛부터의 신앙임"을 인정할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역은 이 땅의 종교문화로부터 거대한 위치를 차지고 있다. 이런 종교문화에 발판을 둔 한국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심성은 신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에 대한 대단한 존경을 갖게 되고 주어진 메시지에 관하여는 최우선적인 경의를 표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서 깊은 주의를 요하는 것은 첨단의 문화에 승선(乘船)한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선포된 메시지에 맹종적인 경청이나 추종을 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판단을 거쳐 소화 내지 거부를 한다는 현실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목이 쉬도록 외친 오늘의 설교자 앞에 앉아 있는 성도들이 그 설교에 만족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이론대로 전달한 메시지가 의도한데로 회중들에 의하여 공유(共有-Sharing)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설교자가 자신이 전한 메시지에 대한 메아리가 최소한 다음의 것들이기를 바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수 가 없다. "목사님, 오늘의 설교는 저의 생애에 소중한 결단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목사님, 오늘의 설교에서 깊은 은혜와 감명을 받았습니다. " "목사님,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저의 고민하여 온 문제의 해답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이러한 주옥같은 반응을 받은 설교자들이 한국의 땅에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들의 교회가 성장을 거듭하면서 생명이 차고 넘치는 말씀으로 가득한 현장을 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교회 강단에서 위와 같은 응답을 듣는다는 것은 설교자의 희망사항일 뿐 실질적으로 설교자의 귀에는 좀처럼 들리지 아니한 것들이다. 오히려 설교자의 가슴을 너무나 아프게 하는 다음과 같은 속삭임이 설교자의 귀에 훨씬 쉽게 들려온다. "오늘도 예화의 진열장으로 설교가 끝이 나고 말았군" "또 자신의 경험과 세상 이야기를 나열한 채 그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 말군"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 자장가에 불과 하기에 나는 잘 수밖에 없었어" "이제는 지겹고 실증만을 불러일으키는 설교가 되어 더 이상의 인내는 힘이 들어" 여기서 우리의 설교자들은 깊은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무엇 때문에 오늘의 설교현장은 이렇게 슬픈 반응을 받게 되며 침몰되어가는 조각배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가? 분명코 까닭이 있다. 까닭이 있기에 문제가 발생되었다. 그 문제들은 지금껏 설교자를 반신적(半神的)인 존재로 절대화 시켜온 우리의 강토에서는 언제한번 시원스럽게 파해쳐보지를 못하였다. 유교의 유산으로 너무나 오랫동안 이 땅에서 지속해온 계층의식은 설교자의 모순과 이탈을 감히 지적하지 못하도록 하여왔다. 이것이 바로 수직문화의 비극이요 더 낳은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였다. 그 결과는 오늘의 설교를 위기의 상황으로 몰고온 독소들을 오히려 더 확산시키게 되었고 오늘의 설교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무엇이 우리의 성스러운 설교의 사역을 병들게 하는 요소들인가? 1). 설교 전문인을 위한 교육과정의 시급성 교육이란 천부적인 특수한 재능을 가진 자에게는 그것을 더욱 개발하여 빛나게 하는 것이며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후천적인 노력을 통하여 어느 한계에 도달하게 만드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육이란 모든 분야의 필수적인 것이며 초석이 되는 것이다. 특별히 특수분야의 경우는 그 교육은 훈련의 성격을 동반하면서 전문인으로서의 기능과 위치를 확보해주는 중요한 역활을 감당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사명자들은 누구나 함부로 감당할 수 없는 특수분야의 전문인들이라는데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이 말씀의 사자들은 인간사회가 지향하는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기 전에 신과의 깊은 연접(Link)과 그것을 지속하는 높은 영성(靈性)의 지속을 요구한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필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할 수 있는 기본 실력을 쌓아야 하고 그 말씀을 전달하는 방법과 기술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 더욱이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교육수준이 고도화 되어가는 오늘에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설교의 이론과 실제 과정의 성실한 이수는 그 시급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본다. 다음은 1925년 강도학(講道學)을 펴내는데 역자로 참여했던 고려위(高麗偉)는 오늘 우리가 반듯이 음미해야 중요한 부탁을 남긴바 있다. 福音은完全無缺한眞理이나其傳하난方法의巧拙이잇셔聽衆을感분激昻케하난 差等이不無하니講道의效果를獨히聖神의게만依하고其法을少許도學習하지 아니하니함은妄信이오愚見이라 2). 극도에 달한 "나"의 등장 전통적으로 설교사역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회중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운반하는'말씀의 사자'로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칼빈이 설교자를 하나님의 위탁을 받은 대사(Ambassador)로 이름하였다. 그리고 칼 발트도 설교를 정의 할때 "하나님이 선택한 설교자를 통하여 인간들에게 들려운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설교자에 대한 견해는 오랫동안 기독교의 강단에서 지속해왔다. 그래서 설교는 언제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삶의 장에 적용해주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맥을 이은 한국 교회에서도 처음부터 그렇게 가르쳐왔다. 한국의 신학교육의 초창기 부터 설교학을 가르쳤던 곽안련 교수는 "설교인은 청중에게 향하여 마치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아는 바를 너희에게 말하겠다.'와 같은 태도"는 절대 금물임을 강조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을 받은 평양신학교 출신 설교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설교의 교육을 실현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설교자들은 전혀 다른 세계를 달리고 있다. 설교학 교육의 수준이 경험담을 들려주는데 끝난 시절의 피교육자들인 이들은 신언(神言)과 인언(人言)을 분간하지 못한 경지 속에서 설교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우리의 귀에 들려져야 할 설교문장은 예를 들면 분명히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말의 뜻은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경우 (간단한 실례-예화)를 가르킨 말씀입니다" 또는,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그 뜻은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사례의 경우입니다." 이처럼 모든 설교의 문장의 주어는 성삼위(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으로 분명하게 구성되고 그 뜻을 밝혀주고 적용을 해주는 것이 설교의 본질이다. 이럴 때 만이 메시지의 주인이 뚜렷하고 설교자가 단순히 도구(Instrument)의 역을 감당함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신언의 부각은 주어를 중심하여 엮어진 인도 유럽말의 경우는 조금도 지장을 받지 않고 너무나 당연하게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는 술어중심의 언어로서 주어가 너무 많이 생략된다. 더욱이 일인칭 주어는 아예 생략하여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정감을 더해주기에 주어 없는 문장의 활용이 너무 보편화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오늘의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다음의 종결어(終結語)에서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설교의 탈선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충분히 입증을 해 주고 있다. '축원합니다.'' 믿습니다' '원합니다.''바랍니다' '생각합니다' '느낍니다' '기원합니다' 이상에서 본 종결어의 주어는 어떤 경우도 설교자 (나) 자신이다. 여기서 외국의 설교자와는 달리 한국의 설교자는 너무나 자신의 등장을 극심한 경지에까지 끌고 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는 설교내용이 설교자의 말과 경험과 지식과 그가 즐겨쓰는 예화로 완전히 채색된다. 그리고 회중들로부터 '아멘'만 유발시키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다는 착각에 빠지고 있다. 이러한 현장에서 너무나 뚜렷이 나타난 현상은 막상 전해져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의 말에 가리워져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말씀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설교, 그것은 가장 심각한 설교의 위기를 몰고온 위급한 요소라 아니할 수 없다. 3) 한국의 설교자와 설교 횟수의 축소 개신교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에 촛점을 둔 종교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말씀으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 교회도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의 선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신선한 내용과 타당한 논리를 수반하지 않고 시간을 메꾸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외쳐진다면 거기에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인간에 의하여 동일한 메시지가 반복되어진다면 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에게 막중한 부담을 안겨주게 되며 바라는 효과성은 지극히 제한을 받게된다. 우리의 한국교회의 설교자가 감당해야 하는 설교의 횟수와 그 양은 실로 지탱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한 주간을 두고 보면 주일 낮설교를 비롯하여 주일밤, 수요일 밤, 그리고 매일의 새벽과 금요철야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설교자는 설교의 홍수 속에 휘말리고 있다. 최소한 주일 낮과 밤, 그리고 수요일밤 만을 계산해도 일년에 165회의 설교를 해야하고 10년이면 1560편의 설교를 해야 하는 실정이다. 과연 이런 짐을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인가? 한 설교자가 소유하고 있는 언어와 지식은 한계가 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늘 신선하고 역동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실로 부끄러움에 가까운 사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의 어느 교회를 가보아도 한국 교회처럼 설교만을 의존하는 예배가 이렇게 빈번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든 형편이다. 그리고 설교의 역사에 아무리 위대한 설교가라 하더라도 수 천편의 설교를 남겼다는 기록은 아직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의 설교현장만은 이 엄청난 사역을 진행시키고 있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어쩔 수 없이 수 없는 반복을 거듭해야 하고 거기에 더하여 기계적인 습성, 그리고 만성적인 언어의 유희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럴 때 교회의 강단은 생명력을 잃게 되고 설교는 몰락의 벼랑을 향하여 서서히 달려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기에 설교의 횟수를 줄이는 것이 설교자와 회중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길이라고 본다. 주일의 낮예배 만은 하나님과 인간에게 부끄러움 없는 반듯한 설교를 하도록 하고 주일밤과 수요일 밤의 기도회 등은 모두 성경강해 또는 계획된 성경공부를 비롯한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개발 할 필요가 있다. 이럴 때 설교는 기다림 속에서 경청을 하게 되고 새롭고 신선한 말씀으로서 회중들의 심령에 심어 질 수 있다. 교회의 예배가 진정 목사의 설교에 성패를 건다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일이다. "기독교 신앙을 전하는 데 있어서 독보적 존재로서 우상화되어 왔던 설교는 이제 그 왕관을 벗을 필요가 있다"라고 설파한 베델(Theodore Wedel)의 말에 새삼스럽게 귀를 기울여 음미해 볼 필요를 느낄 시점에 와 있다고 본다. 4). 설교의 복제문제와 개발의 필연성설교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매일 받아먹었던 만나와 같은 것이다. 그때의 만나는 어제의 것을 오늘 다시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안식일을 제외한 모든 날들은 그 날 받아 그 날 먹어야 했던 가장 신선한 양식이었다. 생각하면 오늘의 설교도 언제나 신선한 만나와 같은 양식으로 회중들의 심령에 넣어 주어야 하는 것이 너무나 타당한 일이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한 주간 내내 말씀의 전달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몸부림을 치면서 메시지를 받고, 그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에 자신의 시간을 아낌없이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말씀에 먼저 용해되는 감격을 경험하고 난 후에 회중들 앞에 서서 그 감격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하나의 이변이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설교집의 출판이 당연한 경쟁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목적이 뚜렷하지를 아니하다. [나는 이렇게 설교를 했다]는 자랑인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설교를 기록화 시켜 교인들에게 다시 읽히도록 하는 목적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러나 두 가지의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수반하는 경우를 본다. 하나는 동역자 된 설교자들이 그 설교문을 그대로 복사하여 강단에 들고나서는 부끄러운 죄를 유발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이 펴낸 설교를 교인들이 읽고 난 후 어느 때인가 [목사님은 지난번 했던 설교들을 다시 재탕하십니다] 하면서 새로운 실망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필자는 후자보다는 전자의 사건에 더욱 깊은 두려움을 가져본다. 자신이 먹이고 가꾸는 양들을 위하여서 목자는 더 좋은 꼴을 찾아 헤매이는 수고를 해야함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땀을 흘림이 없이 다른 목자가 이미 먹여버린 것을 울 넘어 가져다가 자신의 것인양 내양들을 먹여도 되는 것인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행위가 습관화되는 날 찾아오는 결과는 참으로 비참한 것들이다. 그것은 자신의 설교능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그 회복이 너무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는 사실이며, 또 하나는 회중들이 다른 곳에서 듣거나 동일한 설교집을 읽은 경우 조금의 동정도 없이 경멸의 시선을 자신에게 보내게 된다는 사실에 깊이 유의해야 한다. 현대를 달리는 설교자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교회마다 그들의 환경과 수준과 신앙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만을 위하여 필요한 양식이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결코 남의 설교를 복사하여 그대로 먹일 수 없는 자신들의 양들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삯군된 목자는 그 이마에서 땀 흘리기를 거부하고 쉽고 편한 곁길을 즐겨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참 목자는 눈물과 땀을 때로는 피까지 흘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양들의 먹이를 찾아 먹인다. 홍수처럼 쏟아진 설교집이 오늘의 설교사역에 에덴동산의 과일처럼 등장이 되고 설교자들에게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 되고 있다. 특별히 자신이 설교를 하려는 본문과 주제를 결정한 후에 설교자의 손이 서서히 남의 설교집을 만지고 그 눈길이 거기에 머물려는 유혹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참된 설교자는 거기서 과감한 결단을 내리면서 야곱처럼 자신의 환도뼈가 상하더라도 하나님을 붙들고 내 양들이 살찔 수 있는 양식을 달라고 매어달리면서 펜을 잡고 자신의 설교원고에 받아쓰는 과정을 밟아야 할 것이다. 본훼퍼가 조국에 돌아가 히틀러의 칼날을 피하여 지하의 신학교에서 설교학 교수로서 열강을 토하면서 남긴 말이 새삼스럽게 한국의 설교자들을 향하여 들려지고 있다. "설교는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그 자신이다....말씀으로서 회중들 가운데를 걷고 있는 그리스도 그 자신이다." 그렇다 설교자는 오늘 자신의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와 땀흘린 준비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나에게 맡겨진 회중들에게 오셔서 그 가운데 걷도록 해드리는 것이 오늘 한국의 강단을 지키는 설교자의 진정한 사명이다. 5). 설교자의 땀과 피로 적시는 설교[목회의 장(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목회자들에게 던질 때 응답자의 70%가 설교라고 대답을 한다. 이러한 응답은 설교자들의 생활 속에서 그대로 반영이 된다. 그들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설교에 대한 부담을 앉고 살아가는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설교자들이 막상 설교준비를 위하여서 내놓은 시간은 30%도 되지 않은 다는데 그 심각성이 내재하고 있다. 설교가 목회의 장에서 70%의 비중을 차지한다면 자신의 시간도 그 정도를 할애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설교자는 성령의 손에 잡힌 도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설교가 수록되어진 녹음기와 같은 단순도구가 아니다. 설교사역은 언제나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전달하는 일이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하여서는 자나깨나 명령을 기다리고 생각하고 자료를 찾아 헤매이는 것이 생활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 사실 설교의 준비는 끝없는 정성과 준비가 요구되어진 특수한 사역이다. 이런 까닭에 설교자는 남달리 건강한 영성를 가꾸어 영적으로 건강한 호흡을 하는 존재여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할 수 있는 지적인 바탕과 성장을 쉬지 아니해야 할 존재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브라이트 신학교 설교학 교수였던 베켈히머(H. Beckelhymer)의 말을 되새겨 본다. 성공적인 설교란 쉬운 것이 아니다. 설교를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공적인 설교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설교란 한 인간의 신앙과 정성어린 마음과 언어의 기술과 그리고 지적인 모든 바탕의 최고점을 요구하는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설교자는 25분의 설교를 위하여 최소한 25시간을 쏟을 수 있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즉 매일의 오전 4시간은 설교준비를 위하여 바치는 설교자여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삶의 장에서 주어진 말씀을 적용할 수 있는 정황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 할 수 있는 예지의 감각이 추구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은 심방을 비롯하여 각종행사와 기타의 일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쏟아버리고 피곤한 주말에 설교를 준비한다고 앉아있게 된다. 이러한 설교자에게 시선한 만나가 주어지고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터득 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는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피곤과 졸음의 산실(産室)에서 과연 생명을 깨우치는 설교가 이룩될 수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6). 성언이 없는 설교의 범람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기록되어진 말씀이 설교자에 의하여 현장의 언어로 선포되어지지 않고 해석되어지지 않은데 기인한다. 설교는 설교자의 사상이나 경험이나 유명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종교수필 또는 교양강좌가 아니기에 언제나 기본적으로 봉독되어진 성경의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설교자의 정도(正道)임은 수차에 강조해온 사실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현장에 얼마나 많은 회중들이 모여 열광적으로 '아멘'을 연발하는가에 눈을 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충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그들에게 들려주었는지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의 강단에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설교자의 연출이 속출하고 있다. 즉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의 봉사자가 아니라 지배자로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설교자가 자신의 생각과 사상,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흥미진진한 예화를 나열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을 들려주는 현상이 너무나 빈번하게 발견되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지식과 분석, 또는 경험을 실은 이야기하고 난 다음에 그 경험담에 좀더 튼튼한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설교가 시작되기 전에 봉독한 본문을 인용하여 본문은 설교자를 위한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설교의 현실을 우리의 한국교회에서는 너무 자주 보게된다. 이러한 선상에서 오늘도 설교사역을 감다하고 있는 설교자는 다음의 말에 깊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메시지의 재원이 시대적인 사건, 문학, 철학, 정치 이데올로기 등이 될 수는 결코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설교자 자신의 경험과 감정까지도 설교의 원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설교의 메시지는 성경에다만 그 원천을 두어야 한다. 여기서 한국의 강단이 인식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설교는 단순한 신앙간증과는 너무나 다른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는 문제이다. 신앙간증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자신의 경험과 판단에 기준을 두기 때문에 회중들로부터 공감대만 형성하면 된다는 지극히 한정된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설교는 그 기준이 그 날의 설교본문에 있다. 그 본문은 설교자와 회중 모두에 의하여 함께 읽혀진다. 거기서 회중들은 그 말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소유한 상태에서 설교자가 그 말씀을 어떻게 선포하고 해석하고 자신들의 삶의 장에 적용시켜주는지를 주시하게된다. 그러기에 설교는 수많은 회중의 감시를 받으면서 본문이 말씀한 범위를 벗어나서는 아니되는 엄격한 제한을 받고 있다. 결과적으로 설교자는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 말씀을 듣기 위하여 설교자의 앞에 앉아 있는 무리들로부터 우선적으로 봉독되어진 말씀의 지배자가 아닌 봉사자가 될 것을 철처히 요구를 받게된다. 7). 물량주의와 기복사상을 심는 설교의 실상 설교는 시대상황에 따라 메시지의 방향이 어느 한편에 치중될 수 있고 또 그러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형편이 어떤 위치에 있던지 그 메시지는 하나님을 중심하여 그 나라와 의를 확장해 나가는데 그 기본적인 목적을 두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메시지의 바른 형태이며 지난 수 천년 동안 설교사역의 주역들은 이 괘도를 지키기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그런데 우리의 한국 강단은 이 땅의 종교문화에 너무 극심하게 편승을 하고 있다. 즉 가난을 탈피하고 한을 풀어 풍족한 복을 누리려는 절박한 욕구를 종교에서 채우려는 신앙심을 그대로 수용하는 메시지가 범람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들의 영과 육과 범사가 잘되어 복을 담아야 할 그들의 창고가 차고 넘치는 길을 알려주는데 주안점을 둔 설교가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다. 거기서 다시 한번 한국의 강단이 흔들리고 침몰의 위기를 맞는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결과는 회중의 가슴을 울리고 반성과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적 설교의 현장에는 교인들이 모이지를 아니하고 [축복의 성회],[신유의 성회], [은사의 성회]라는 현수막이 있는 곳에 한국 성도들의 발길이 무수히 몰리게된다. 바로 이런 사연들이 오늘의 설교사역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회중들의 기복위주의 취향에 따라주지 않은 설교자는 외면 당하고 떠나주기를 바라는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성도를 양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바로 이것이 기복사상과 물량주의에 촛점을 두고 목이 쉬도록 외쳐온 설교가들이 맞는 자업자득의 현상이다. 8).설교의 내용과 설교자의 삶에 대한 괘리현상필자가 한국교회의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여 연구 조사한바 있는 [설교사역자에 대한 평신도의 의식구조 분석]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바있다. "귀하가 아는 설교자들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들의 설교와 삶의 연관성이 어떠하다고 보십니까?" 여기에 대한 응답자의 80.2%가 "완전치는 못하지만 설교대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응답을 하였고 10.3%는 "설교자는 설교하는 대로 생활한다."라고 대답한 바 있다. 이러한 응답의 비율은 서구교회에 비교하여 월등하게 높은 비율이다. 이것은 바로 이 땅이 유교문화의 영향권에서 오랫동안 정착해온 결과로서 도덕성의 강조와 선비의 고결한 인격성에 대한 높은 기대가 그대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다. 문제는 오늘의 설교자들이 가장 고결한 성직인 목사로서 자신이 전달한 메시지를 먼저 실천하는 본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설교자의 대답이다. 여기에 대한 솔직한 대답은 최근에 들어와 대단히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사회에서 실종의 위기에 직면한 윤리와 도덕성이 설교사역자들의 삶과 인격에 의하여 살아나지 못한 채 오히려 심각한 탈선이 여기저기서 발생되고 있다. 성전에서의 살인사건, 밀수에 가담한 목사들의 이름, 그리고 외화낭비에 선두주자로서의 목사의 생활, 외국신학교의 분교를 설치하고 박사학위를 남발하는 주범들로서 신문에 그 이름이 오르내리는 현상은 오늘의 설교사역을 가장 멍들게 하는 치욕적인 보도들이다. 설교자가 이 땅에서 풍겨오던 고유한 상은 남다른 것이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헌신적이고 검소한 생활의 주인이었으며 풍기는 인격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고결한 품성과 지식을 소유한 것이 한국의 설교자 상(像)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목사는 물질의 풍요를 앞서서 누리는 상류사회의 생활인들로 변화되고 때로는 극소수의 설교자들에 의하여 자신이 외친 메시지와 자신의 삶과 인격과는 무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펼치면서 이 땅의 설교사역을 어둡게 하고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이 "생활하는 집과 말씀의 집"을 따로 지을 때 설교사역에 찾아드는 슬픈 비극적 결과는 실로 엄청날 것이라는데 유의해야 할 것이다. 9). 목회의 수단과 방편이 될 수 없는 설교설교란 기본적으로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설교자 개인의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없다. 설교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발산하는 무대가 될 수 없고 회중을 선동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집단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런데 현대의 소수의 설교자들에 의하여 설교의 본래적인 성격이 퇴색되기 시작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지식과 연구의 결핍을 회중들로 보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서 신비주의를 도입하는 사례를 본다. 방언과 예언의 신비한 현상을 유도하여 그것이 말씀 위에 군림하도록 하는 실수를 범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직접적인 지적을 하면서 때로는 위협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절대화하여 심지어는 저주를 행하는 모습을 본다. 이럴 때는 마치 설교자가 하나님으로 둔갑한 모습을 자행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햐 하는 강단은 헌금을 수집하는 무대로 변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설교가 목회자의 뜻을 펼치는 수단의 방편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때 우리의 목회자들의 사회에서는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오고갔었다. 부흥집회를 위하여 강사를 모실 때 특유한 방법으로 헌금을 많이 하게 하는 강사를 초빙을 하면서 수입을 어떻게 분배한다는 약속을 했어야 하는 시절도 있었다. 생각하면 얼마나 한국교회의 강단이 철저하게 탈선하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설교가 목회적 수단으로 이용되는 효과적인 이기(利器)로 전락된다면 거기에는 밝은 내일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어둡고 침울한 장래만이 있을 뿐이다. 언제나 설교는 "은혜의 효율적인 방편으로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이지 결코 인간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또는 설교자의 정신적 피곤을 풀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진정한 설교는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신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생명의 선물을 전하는 것"이다. 10). 설교자의 착각적 과신(過信)의 문제인간이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은 일의 진전에 절대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일정한 일을 수년을 넘게 계속하면 스스로 진전 시킬수 있는 요령과 기술이 터득되면서 전문인의 세계를 달리게 된다. 그럴 때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는 자신의 고유한 영역의 성을 쌓게 된다. 설교사역 역시 이상과 같은 이론을 도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어느 설교자나 자신의 강단에 설 때 자신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고 유창한 설교를 펼쳐나간다. 그 몸가짐에서 그리고 슬슬 쏟아져 나오는 달변에서 회중은 설교자의 전문성과 그 성스러운 직책에 대한 인정을 한다. 그리고 아멘을 연발하면서 그 설교에 심취되는 경우를 본다. 이런 현상 앞에서 어떤 설교가도 자신의 부족에 대한 인정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설교자의 설교를 비데오에 담아 설교자 자신이 보도록 할 때마다 거의 모든 설교자가 반응하는 다음의 말은 우리가 깊이 음미해 볼 만하다. "저게 나의 설교인가요? 저 정도의 수준에 불과하던가요? 실망인데요." 이 반응의 응답은 바로 자신의 설교가 자신이 생각했던 수준에 미달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 필자가 십 수년이 넘도록 경험해온 설교학 교실에서의 실태는 아무도 자신의 설교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우월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설교자가 없었다. 환언하면 거의 모든 설교자가 착각적 과신의 늪에 빠져서 설교사역을 진행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에게 설교향상을 위한 겸허한 노력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모른 채 이어지는 설교를 메꾸면서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른 사이에 어느덧 자신감이 형성하게 되고 드높은 권위의 의자에 앉아 교주적(敎主的) 자세를 취하게 된다는 슬픈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자연적으로 스스로를 성공적인 설교자라고 자부하게 되는 교만의 자리를 향하게 된다. 평생을 설교학 교수로 살았던 일리온 죤스(Ilion Jones)는 조각가 도발드슨 (Thorvaldsen)의 말을 연상하면서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 만족할 때 그는 스스로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라고 갈파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설교자가 자신은 초보단계를 벗어난 완벽한 설교자라고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완벽한 설교를 추구하는 설교자는 있으나 완벽한 설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설교학에서 반복하여 가르치는 말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설교가 최상의 단계에 이른 것 마냥 믿고 더 이상의 발전을 추구하지 않은 착각적 과신의 주인들이 우리의 한국교회에 강단에 너무 많이 서 있음을 볼 때 한국교회의 미래가 지극히 염려되지 않을 수 없다. 진정 설교의 자만과 교만에 빠져 있는 설교자에게는 성령의 도움이 떠나고 다음의 말씀만 그 귀에 들려줄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맺는말: 1960년대 후반에 클라이드 리드(Clyde Reid)에 의하여 설교의 위기 (Empty Pulpit)라는 적은 책이 출판되자 미국의 교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설교자들은 심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리드는 이 책자를 통하여 지금까지 안일하게 설교의 사역을 감당해 오던 설교자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대담하면서도 솔직한 도전장을 던진 바 있었다. 여기에서 강단이 비어 있다는 말 (empty pulpit)은 목사가 없는 교회 강단을 의미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목사가 강단을 지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좌석에 앉아 있는 교인들이 말 할 수 없이 허전해 하고, 전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며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심각한 곤경에 부딪쳐 있는 오늘의 강단을 의미한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에 미국의 강단을 향하여 있었던 이러한 예리한 지적이 전혀 생소하게 들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 우리의 한국교회 강단을 향하여 직선적으로 들려주는 고마운 지적으로 받아드리고 싶은 충동을 더욱 절실히 느낀다. 그 이유는 위에서 지적한 부끄러운 사연들이 오늘 우리 한국의 강단에서 벌써부터 발생하고 있었으며 지금은 오히려 더 심각한 경지에 이르러 '설교의 몰락' 또는 '설교의 임종'이라는 슬픈 비판들이 등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의 한국교회 설교사역은 아직도 건제(健在)한 면이 없지 아니하다. 선진국의 교회에서 볼 수 없는 설교자의 뜨거운 기도가 있고 생사를 걸고 뛰는 목회의 열심이 있는 한국교회이다. 그리고 아직도 순교의 피가 우리의 바닥을 흐르고 선교의 뜨거운 열기가 쉬지 않은 우리의 교회이다. 어떤 땅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심취성이 강한 우리의 성도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아직도 앞에서 열거한 설교의 위기요소에 물들지 않은 맑고 귀한 설교자들이 우리의 한국교회를 지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는 세계의 교회역사에 특유한 교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얼마동안 왕성했다가 시들어지는 기록을 역사에 남긴 채 그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서구교회의 후예가 되기를 거부한다. 세상 끝날까지 부흥만을 지속하는 교회가 되겠다는 이 소박한 소망의 실현을 위하여 이 땅의 목회자들은 자신이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치면서 땀과 눈물을 오늘도 쏟고 있다. 그러나 국민소득의 향상에 기인한 물질만능의 시대적 부산물이 우리 속에 이미 침투해 왔으며 성직의 탈선적 조짐이 심각하리 만큼 대두되기 시작한다. 이때에 설교는 살아있는 불씨의 역을 감당해야 하는데 함께 탈선을 한다면 이 땅의 교회는 소망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한국강단의 설교가 침몰되기 전에 최소한 이상과 같은 시급한 요소들에 대하여 엄격한 자기진단과 성찰이 있어져야 한다. 그리고 나타난 위기현상들에 대한 시급한 대책이 마련되어져야 할 것이다. 한편, 정장복 총장(한일장신대학교)은 청해진 완도출신이며 고향마을 청산교회의 종지기 소년이었던 그는 신축 건축헌금으로 거액을 헌금하시고 청산교회 건축설계를 건국대교수(경남 외도 건축물 설계자)에게 부탁하여 무료로 설계까지 지원했다.<石泉김용환 발행인, 대표기자>새감각 바른언론-청해진농수산신문 www.chjnews.kr 입력020100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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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정장복 교수의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청해진농수산신문 기획] 정장복 교수의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제 목 :이 시대에 만나고 싶은 목회자 ▲정장복 교수-한일장신대 총장 시작하는 말 시대의 흐름이 험준하면 할수록 등불을 들고 사람을 찾는 발길은 끊이지를 아니합니다. 특별히 혼탁한 사회가 다가 올 때 교회가 거룩한 피안처이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 피안처에서 반겨주는 목회자는 오염된 무리와는 다른 분이기를 바랍니다. 이 기대가 무너지는 날 그분이 운반해주는 진리도 상처를 입게 됩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찬사가 이제는 이 나라 이 민족의 한 복판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한 세기 전에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올 때는 교회마다 우리의 미풍양속을 고집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제는 그 소리마저 들리지 아니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아름다웠던 문화도 보이지 않고 인륜이 무너지는 현장의 소리만이 이곳 저곳에서 들려옵니다. 마치 엘리뇨 현상이 지구의 기상이변을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이 땅의 삶의 기준이나 양태도 사정없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누구를 붙들고 내 자신의 헝클어진 몸가짐이나 경건성의 문제를 말해야 할지 그 대상이 보이지 아니한 몹시 어두운 밤입니다. 나의 등불이 어두워서 찾지 못한지 아니면 대상이 없어서 만나지 못한지 혼돈에 빠집니다. 1. 경건한 목사님보다는 [좋디좋은] 사람을 찾습니다. 어느 시인이 다음의 "어떤 戀歌"에서 노래한 주인이 바로 저희들이 찾고 싶은 분입니다. 당신은 언제나 어데서나 만나 봐도 전혀 낯설지 않은 그런 사람입니다 만나면 반갑고 헤어져도 전혀 부담이 없는 그저 좋디좋은 사람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스스럼없이 만날 때도 서로가 궁금한 것이 전혀 없고 또한 헤어지면서 다시 만날 것을 다짐하지 않아도 될 그런 좋디좋은 사람입니다 --중략-- 당신이 싫어 내가 문전박대 할 때도 말없이 돌아서서 갈 줄 아는 사람.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사람, 상한 갈대도 함부로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훅 하고 불어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나운 바람을 잠재우고 저 거친 파도를 잔잔케 하는 사람, 별과 달과 태양의 눈을 감게 하는 사랑입니다. 당신은 가난한 詩人인 내 집에 빈손으로 들어와도 괜찮고 가져갈 것이 없어 빈손으로 떠나가도 조금도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내 영혼이 깊은 잠에 빠져 두꺼운 우수의 커튼을 내리우는 그런 밤에도 창밖에 홀로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그저 좋디좋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너무 높은 곳에 있어 쳐다볼 필요가 없고 또 저 낮은 곳에 있어 내려다 볼 필요가 없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 되어 만났다 헤어져도 아무렇지 않은 편하디 편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다정다감한 말씀입니다 당신은 정말 내 영원한 이웃입니다. -程麗成 [어떤 戀歌 I]- 2. 유창한 설교자보다 행동하는 설교자를 찾습니다. 우리는 한 때 강단의 설교자들을 우러러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말씀이 생활 속에서 실천되기에 그렇게 크고 자신 있게 외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설교자를 거룩한 성인으로 존경하였습니다. 그 분과 시선이 부딪히는 것마저 두려워했습니다. 그분이 주신 말씀대로 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기 때문이었고, 그 분이 나의 부끄러운 사연을 모두 아시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이러한 저희들의 이해에는 거대한 변화가 일고 있습니다. 명예를 탐내는 자리에, 물질을 손에 쥐는 자리에, 인생을 즐기는 장소에서 목사님들을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많이 보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마다 17세기의 영국의 퓨리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Richard Boxter가 남긴 다음의 말을 늘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거룩하고 훌륭한 모습을 지닌다면 양떼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찬양과 교리가 양떼들에게 훌륭하고 달콤하게 나타나면 양떼들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나의 심령이 싸늘해지면 나의 설교도 싸늘해지며 나의 심령이 혼돈되면 설교도 혼돈 됩니다‥‥ 내 설교가 냉냉해질 때 내 양떼들이 냉 냉해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오 형제들이여! 그러므로 먼저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돌보시기 바랍니다. 정욕과 정열과 세상적인 경향으로부터 떠나십시오, 신앙과 사랑의 생활을 유지하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계십시오. 자신의 마음을 보살피고 부패를 극복하며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 자신을 매일 보살피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들은 잘못 인도되며 여러분의 양떼들은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도 남이 알지 못하는 기도와 묵상을 많이 하십시오. 거기에서 여러분의 제물을 태울 수 있는 하늘의 불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한국의 예의범절을 지켜주시는 목사님을 찾습니다. 우리 나라는 동방 예의지국으로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동방의 한반도에 사는 우리 민족을 일컬어 예의가 바른 민족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였던 선교사 Gale은 우리 나라가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해 갈 때 서술한 그의 글에서도 우리 민족을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한국 그것은 이제 사라졌는가! 먼 옛날 중국인 마리도 어르신네(Superior man)의 고장이 불렀던 나라, 선비와 책과 붓의 나라, 아름다운 가문의 나라, 시화 수화의 나라, 효자열부의 나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종교적 환상의 나라, 이제 그 나라는 사라졌는가?" 이러한 아름다운 문화권에 태어난 우리의 민족이기에 우리들은 우리의 아름다운 예의범절을 고수하고 싶어 합니다. 혹자는 한국적 예절에 대하여 거부적 반응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미 한국인의 심성에 뿌리를 내린 예절 문화는 한국인의 고유한 생활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설교자와 인격의 기본 틀은 우리의 문화권과 언제나 상관관계를 깊이 맺고 있습니다. 다음의 몇 가지 항목은 설교자가 가시적으로 우선 갖추어야 할 부분들을 열거한 것입니다. 설교자로서 가장 기초적인 인간 모습을 상실해서는 안 되는 시급한 마음에서 몇 가지 사항들을 추려 봅니다. 이 항목들이 우리의 목사님에게 체질화되어 선포된 메시지에 손상이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1) 설교자는 장유유서의 문화를 교회 안팎에서 지키도록 합니다. 특별히 승하차, 문의 출입, 앉은 장소, 음식 상 앞에서 연장자를 우대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2) 설교자는 Lady First의 현대 문화를 철저히 수용해야 합니다. 한국의 여성들은 교회를 통해서 인간 대우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장 한국여성들에게 가장 고마운 곳입니다. 지금도 남존여비의 언어와 행동이 목사님으로부터 보여질 때 여성들은 참으로 측은한 눈길을 감추지 못합니다. 언어사용, 승하차, 문의 출입, 무거운 짐의 운반 등에서 여성에게 우선적인 태도를 취해 주세요. 그리고 봉사의 현장에서 남자로서 앉아서 받기만 하는 자세가 아니라 함께 수고하는 신사로서의 습관을 키워야 합니다. 남자 우월주의에 빠져 여성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비문화인의 자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3) 설교자는 시간엄수를 자신의 인격표현으로 삼아야 합니다. 시간을 지킨다는 것은 사회적인 계약의 이행이다. 그러므로 시간개념에 대한 정확성은 현대사회 에 인격의 기준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지도자로서 시간엄수는 기초상식이며 필수적인 것입니다. 4) 성도들의 사생활에 관여나 전이의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설교자는 목회의 장에서 발생된 성도들과의 상담 또는 심방에서 얻어진 어떤 사연도 정중히 경청해야 하나 그 사연들을 아무에게도 옮길 수 없는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5) 언어의 사용을 대폭 축소하고 선별하며 적절한 음정을 사용하여 대화에 임해야 합니다. 한국의 설교자는 가장 많은 말을 계속해야 하는 힘겨운 위치에 있습니다. 반복된 언어와 고정된 단어를 계속 들어야 하는 상대는 때로는 식상해 하고 거부감을 느낍니다. 고로 적은 말수와 선별된 언어의 생활은 필수적입니다. 특히 자신의 주변 이야기에 적절성을 기하는 설교자여야 합니다. 6) 받는 섬김보다는 주는 섬김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한국의 목회자는 성도들의 사랑을 너무 쉽게 많이 받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가급적이면 지나친 정도의 것은 과감히 사양하거나 받아서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본인에게 전달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청빈의 의미를 알려주도록 합니다. 그리고 감사의 표현을 위하여 전화 또는 서신을 활용하는 습관을 키워야 합니다. 7) 설교자는 언제나 긍정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인상은 온화하고 평화를 안겨주도록 해야 합니다. 살벌한 현대의 세파에 시달린 성도들은 설교자의 자세와 인상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그들에게 긍정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평화를 느낄 수 있도록 해야함은 현대교인들의 일차적인 요구이다. 8) 설교자는 다음의 기본적인 생활의 상식을 필수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① 연장자 또는 윗사람에게는 자신의 이름 아래 목사 또는 전도사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② 전화 통화시 상대의 신분을 알게 된 즉시 바로 문안의 인사를 먼저 하고 대화를 합니다. ③ 윗사람을 모처럼 만났을 때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시겠어요?" 등등의 질문을 하여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언제나 자신을 겸손히 소개하여 자신을 알아보도록 합니다. ④ 음식을 먹거나 차를 마실 때 입으로부터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입에 음식을 넣은 채 말을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⑤ 잘못을 저질렀으면 겸허히 사과하고 용서를 비는 넉넉한 마음과 자세를 갖춘다. 맺는 말 참 인간이 되고 참 목자가 된다는 것은 칼빈의 교리에 나타난 성화의 세계를 말함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불신자와는 구별된 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21세기의 험준한 삶의 장이 불과 수년밖에 남지 아니했습니다.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이 길에서 일고 있는 파도가 너무 험하다고 주저하면 우리의 교회는 도태되고 터전을 잃게 됩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어려워도 오늘의 주제는 우리의 목회자들이 필연코 달성해야 하는 의무감임을 확인 해 주셨으면 합니다. 한국교회 강단의 거성이었던 김화식 목사는 그의 [신앙의 승리]에서 다음과 같이 애절한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신자의 처세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신자는 산꼭대기를 향하여 올라가는 사람이니, 그 길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언덕 아래로 달리는 자이니 그 길이 쉬울 것입니다. 신자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니 그 진행이 어렵고, 세상 사람은 물결을 따라서 내려가는 사람들이니 그 진행이 쉽습니다. 끝으로 본 발표자는 스스로 걸어오면서 경험한 사연들을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지 못한 체 하나의 희망사항으로 본 강의를 이어가게 되었음을 거듭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바라옵기는 앞으로 주어진 날을 맞이하면서 여러 목사님들과 함께 오늘 발표된 내용들을 혼신을 다하여 수행하려는 의지를 더욱 다짐해 봅니다. 역시 드라이든(Dryden)이 남긴 "인생의 추구는 인생이 새로워질 때까지 무엇인가로 희망을 갖게 한다"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모자람과 부끄러움에 대한 깊은 고뇌의 관문을 통과할 때 [참 사람 참 신자]에 대한 의미가 더욱 저에게도 뚜렷해지리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지난 15년간의 강의실 안팎에서 감당해 온 강의 가운데 오늘처럼 자책과 부끄러움에 젖어 진행해온 강의가 없었음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 시간 이후 어디서 우리가 서로 만나더라도 반듯이 하나 고려해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발표 내용과 저의 삶의 내용과 행동이 차이가 난 것을 발견하시더라도 너무 실망이나 책망을 말아주시고 고민하는 실천신학자의 고뇌를 함께 읽어 주시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여기 기독교 시인이시고 원로 목사님이신 오병수 목사님의 [마음의 화원]을 결론으로 읽어 드립니다. 꽃보다 열매가 더 아름다운 마음의 화원 피어라 곱게 피어라 맑은 눈물 붉은 피의 사랑의 꽃 순정의 꽃 진실의 꽃 바람이 불면 불수록 눈보라 치면 칠수록 더 화려해지는 마음의 화원 칼날에도 뿌리를 박고 층암 절벽에도 거친 광야에도 깊은 산골짜기에도 피어라 (중략) 인생아 아느냐 꽃보다 열매가 더 아름다운 마음의 화원 언제나 생명과 익는 마음의 화원을 장시간 경청하여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2001년12월01일 사이버설교대학원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에서 “이 시대에 만나고 싶은 목회자” 라는 제목으로 강의한 정장복 교수(목사)는 청해진 완도(청산도)출신으로 한남대학교 문리대 영문학과(B. A.), 장로회 신학 대학교(B. D.),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Th. M.), 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S. T. D.), 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 객원 교수, Edinburgh 대학교 연구 교수, 장로회 신학 대학교 교수(역임, 예배학, 설교학)를 역임하고 현재 한일장신대학교 총장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목회자 양성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데 사마리아 땅끝까지 뭇 영혼들을 찾아 님의 품으로 이끌게 하는 거룩한 사역을 이 몸이 평생 동안 걸어야 할 사명의 길로 명령하시었나이다.하는 기도를 드리는 정교수님은 가고 싶은 섬 청산도 고향마을의 청산교회(전남 완도군 청산면 도청리 소재)신축을 위한 건축헌금으로 거액을 기부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한편, 정장복 교수님의 기도가 [님 기리는 아침과 저녁의 창]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어 극동송의[신앙서적 길라잡이]에 소개된 바 있으며 지금 절찬리에 각 서점에서 판매중이다.<石泉 김용환발행인, 대표기자> 새감각 바른언론-청해진농수산신문 www.chjnews.kr 입력:10012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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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고령화사회와 노인장기 요양보험청해진칼럼. 고령화사회와 노인장기 요양보험 완도군 시설 체험기 ▲ 서해식 도민편집장 자본주의 모델인 미국은 사회보장제도가 돈 있는 사람들 위주로 돼있어서 건강보험도 민간 기업이 하고 있어서 약4200만 명이 보험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오바마 대통령이 개혁의 카드를 꺼냈지만 저항이 만만치 않다. 유럽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아래 사회보장제도가 잘돼있어 귀감이 되고 있다. 사회안전망인 사회보험제도는 우편향주의인 자본주의가 좌로 한발짝 이동하고 평등권을 주장한 사회주의가 우로 약간씩 방향전환 하여 도출해낸 복지정책의 핵심마인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선진국 유형을 따라 5대보험 적용국가로 출발했다.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에 이어 2009년7월부터 장기요양보험이 도입되어 건강보험에 통합징수항목이되어 강제보험이 되었다. 초고령화 사회를 대비하여 준비된 보험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저 출산 초고령화사회로 변화를 겪고있다. 전인구대비 65세인구가 7%이상이면 고령화사회라 하는데 이미 지난2000년에 7%를 넘었다.2005년에9.1로가 되었고 오는 2022년에는14%로 고령사회로 2026년에는20%가 넘어서 초고령사회로 진입한다는 예측이 나왔다. 2008년현재 65세인구가 498만명으로 전체인구의 10%가 넘고있다. 머잖아 젊은이3-4명이 노인한명을 부양할 시대가 오고있는 것이다. 교회도 초고령화 사회의 중심에 있다고본다. 특히 농어촌교회는 노년층 교인들이 70-80%를 차지하고있다. 노인문제를 도외시 할 수없는 이슈가 되었다. 정부는 지난해 7월부터 요양보호사 제도를 도입하고 방문요양서비스와 요양원시설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핵가족화로 인해 자녀들은 도회지에 노부모들은 고향에 떨어져 사는데 독거노인과 치매와 중풍 각종질환에 시달리는 어르신들이 많이 늘어난 추세이다. 생활향상으로 수명은 연장되었지만 헝그리시대에 고생한 후유증으로 골병이 든 노인들이 많다고 할 것이다. 농어촌에서 방치된 노인들이 고통을 못 이겨 자살한 사건이 비일 비재했다. 이젠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완도군 (김종식군수)의 경우 다른 지역보다 2년먼저 시범지역으로 노인복지가 시작되어 선진사례로 꼽힌다. 완도군외면에 청해요양원, 고금면에 고금요양원이 있는데 지역교회가 수탁기관으로 선정되어 모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특히 교계에서는 기독교장로회가 한기장 복지재단을 설립해 지역교회와 연계하여 시범적으로 운영한다. 필자는 노령화사회를 체험하고자 요양보호사교육을 받으면서 완도 제일교회가 운영하는 고금요양원에서 5일간 체험을 했다. 어느 자녀가 부모에게 그렇게 잘할 수 있을까? 삼시세끼 질 좋은 쌀밥에 영양사가 매식사 때마다 다른 메뉴로 깔끔하게 어르신들에게 공양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모든 시스템이 성의껏 임하는 직원들의 봉사정신에 감동했다. 치매환자, 거동을 못하는 중풍환자, 그들은 지금 안락한 노후생활을 보내고 있다. 자식들이 못한 효도를 국가적 제도로 통해 보상받고 있었다. 이심국 원장(제일교회장로, 박은경 청산면장 남편)은 병원에 가면 죽고 이곳에 오면 산다고 얘기들 한다고 했다. 맞는말이다. 50명1,2급 장애 어르신들이 복음도 들으면서 천국의 소망도 가꾸어가고 있는 곳이다. 완도군은 청산면은 이미 25%의 노인인구로 초고령화사회이고 금일읍도 23%가 되고 있다.완도군은20%가 넘어서 노인복지에 행정력을 모으고 있지만 일자리도 창출하여 생산적인 복지정책도 병행해 가야할 것으로 보인다. 새감각 바른언론-완도청해진www.wandonews.kr입력:0912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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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성광교회 낙도 선교활동 호평완도성광교회 낙도 선교활동 호평 모도 섬에서 예수님의 사랑전하는 성도들 ▲ 성광교회 모도 봉사- CTS기독교TV 전남 완도지역에서 낙도 선교활동으로 도서민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성광교회(정우겸 목사) 성도들의 봉사활동이 주민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다. 65세가 훌쩍 넘는 노인분들이 전남도내에서 제일 많다는 청산도의 부속도서 모도 섬마을은 보일러가 고장나고 전구가 나가도 교체하는 일이 어려운 실정이다. 교통편이 원활하지 못한 섬 지역은 어려움이 더욱 크다.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며 섬 교회에 맞춤형 사역을 지원하고 있는 교회가 완도에 있다는 것. 전남 완도에 있는 성광교회 선교부가 150여명이 살고 있는 작은 섬 모도로 선교활동을 위해 찾았다. 모도는 영화 ‘서편제’및 봄의 왈츠 촬영지로 유명한 가고싶은 섬 청산도의 부속도서인 인근 섬으로 여객선이 하루에 한번 밖에 운행되지 않아 이날은 완도해양경찰서의 수송지원을 받았다는 것. CTS기독교TV에 지난 6월4일 방송된 인터뷰에 신용철 정장(완도해양경찰서 함정)은 낙후된 도서라 다른 혜택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교회에서 자원봉사 나오면 저희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고 있다. 작은 섬마을에 확성기로 동네 이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SOT 물리치료와 침술을 받길 부탁드립니다. 또한 전기, 보일러, 방충망도 신청해 주시면... 마을회관에 차려진 물리치료실은 이른 아침부터 방송을 듣고 찾아온 주민들로 가득하고 옆 건물에선 이ㆍ미용 봉사가 한창이다. 완도읍에서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는 성광교회 새가족 소재춘 성도는 오늘은 가게 문을 닫고 함께 했는데 막상 봉사하니까 제 자신이 행복하네요. 한다. 신이철 집사는 작년에도 저희가 이 지역에 봉사 했습니다만, 모도지역 주민들이 내년에 한번만 더 해달라는 간곡한 요청이 있어 가지고 올해는 주민요청에 의해 방충망과 수도펌프 교체작업도 추가됐다고 말했다. 주민 문대근(완도군 청산면 모도리)씨는 이렇게 낙도까지 찾아와 주시고 많이 협조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전했으며 주민 문병채(완도군 청산면 모도리)씨는 이런 낙도에서 고장나도 수리소가 없는데 와서 고쳐주니 너무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완도성광교회는 필리핀, 아프리카, 페루 등 해외선교사 파송뿐 만 아니라, 50여개의 기관과 미자립교회를 지원하고 있다. 특히 협력하고 있는 미자립교회에 물질적 후원과 함께 그들이 필요로 하는 부분들을 직접 해결해 주고 있다는 것. ▲ 정우겸 목사 정우겸 목사(완도성광교회)는 지역교회와 지역이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가 준비해 가지고 가서 섬겨드리면서 그 결과를 지역교회가 또는 선교사님이 얻을 수 있도록. 또는 연계해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그렇게 협력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모도교회 한정배 전도사는 제가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완도성광교회에서 많은 성도분들이 오셔서 섬겨 주시니까 제게 큰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CTS기독교TV 류혜선기자는 외딴 섬으로 목회자 혼자 섬기기에는 한계가 있는 작은 섬교회에 육지교회의 관심과 사랑 그리고 실질적 필요를 채워주는 방문사역은 큰 힘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어려운 지역경제에도 불구하고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단기 해외선교 보다는 눈물로 선교활동중인 관내 섬지역 미자립교회와 섬주민을 위해 사마리아땅끝까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봉사활동으로 호평을 받고있는 성광교회 성도들을 본받아야 한다는 지역사회 여론이다.<金石泉 대표기자> 새감각 바른언론-완도청해진www.wandonews.kr 입력:0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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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완도 성광교회청해진신문 기동취재- 2000년 12월 30일자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완도 성광교회 지역주민과 함께 나눈 '성탄 케익' ▲ 새천년 첫 성탄-2000년12월쌈지공원 (2009년 현재, 빙그레공원) ▲ 지역민과 함께하는 완도성광교회- 본지 2000년 12월 30일자 ▲ 정우겸 목사 전남 완도군 완도읍 개포리(5일장터옆) 성광교회 정우겸목사는 주민들이 함께 하는 쌈지공원에 성탄트리를 세워 예수탄생을 알리는 등 인권,민주,구제,봉사로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교회로 명성이 나있다. 25일 크리스마스 성탄절을 맞이하여 교인들의 의견에 따라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 손수 만든 2000여개의 케익을 나눠주며 지역주민과 함께 예수탄생의 기쁨을 나누는 행사를 쌈지공원현장에서 가졌다. 5일장날로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전 교인들이 참석하여 노상예배를 드린 후 찬송과 함께 찬양율동으로 지역주민들을 감동시키고 2000여개의 케익 전달과 함께 떡국잔치를 벌였다. 특히 성광교회 정목사는 지역개발에도 관심이 많아 완도지역에서 문화혜택을 받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5억여원을 들여 청소년문화센타를 짓고 있다. 빚을 내어 하는 사업이지만 청소년을 위한 문화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이 교인들과 함께 정목사는 더없이 행복하다. 새로운 방법의 교회운영으로 관심을 끌고있는 정목사는 "목사와 평신도(평교인)와는 신앙의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단지 역할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정목사는 앞으로 평신도를 훈련시켜 행정구역단위로 믿지 않는 자들을 해결할 수 있는 '작은 예수들'을 양성할 계획이다. 안 믿는 사람을 돌보며 평신도 사역자로 활동하는 것이 목적이다. 성광교회는 이 목표를 위해 새로운 교육훈련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 평신도를 훈련시켜 모든 운영을 맡기는 새 방법이다. 이를 위해 정우겸목사는 37개의 소그룹을 만들어 교인들을 소그룹에 참여시키고 정책제시를 통해 전 교인이 일하고 노력하는 사역자화 훈련에 주력했다고 한다. 소그룹 토의 활성화로 정목사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아이템과 프로그램을 건의해 깜짝 놀라곤 한 때가 한두번이 아니라 한다. 소그룹에 속한 평교인들은 전도프로그램속에 안믿는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바자회를 열고 싼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한다든지,자신들이 직접 만든 음식을 나누며 교회와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기회를 마련했다. 한번은 전도전야제 행사를 하면서 안 믿는 반장과 이웃, 부녀회장등을 초청해 테이프를 컷팅하게 하고 찬양만 듣고 가도록 하는 '소그룹 평신도의 건의'를 받아들여 시행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추진했는데 정목사는 단지 그들과 함께 테이프를 컷팅하는 것 외에 일체의 설교도 인사말도 순서에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지역주민들은 의외로 딱딱한 분위기보다 교회를 편하게 생각하여 자연스러운 왕래를 유도하게 되었다. 이 결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전도를 한 숫자는 7주만에 200여명 선에 이르렀고 정착률은 50%나 되는 성과를 올려 시골교회로선 도시의 어느 교회보다 좋은 성과를 올렸다. 정우겸목사가 지역주민과 교인에게 인정받기까지는 수많은 고통이 따랐다. 이는 민주화가 한창이던 지난 86년 '침묵'과 '외면'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확신하던 정목사는 완도성광교회로 청빙되어 왔다. 5.18 당시 군부대의 진압을 현장 목격하고 난 후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고 생각했다. 이후 현실에 대한 뚜렷한 비전제시로 정목사는 완도에 민주헌법 정치 국민운동본부를 구성해 민주화 인권운동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그 당시 경찰서와 안기부에선 교회 앞에서의 감시가 항상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교인들은 정목사를 믿고 따라주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후 박애정신으로 빈민층에 관심을 가졌던 그가 완도군 제2의 건국추진위원회의 책임자를 맡고 있으니 세상이 참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소그룹 목회를 교인들에게 이해시키는데 무려 1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이 또한 정목사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있었는지 알만하다. 나라가 어려울 때, 도덕지수가 땅에 떨어질수록 교회가 교인을 교육시키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게 정목사의 변함없는 신념으로 '하나님밖에 두려워하지 않고 죄 밖에는 피하지 않으며,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20명의 젊은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웨슬러의 말'을 굳게 믿고 그들을 교육시켰다고 한다. 어두운 시대에 이 민족을 변화시킬 힘과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회개와 폭넓은 경건과 절제의 삶에 있다며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성광교회의 사랑의 불꽃운동은 추운 겨울도 아랑곳 하지않고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소망'입니다. 한편 성광교회 평신도들은 영성훈련에도 남다른 열정을 갖고 JOY,TRES,DIAS에 많이 참가하여 뉴뻬스까도르들의 사랑의 불꽃운동을 수년째 전하고 있다. 본지에서는 캔디데이트들을 섬기기 위해 열심히 봉사 해주신 팀 멤버 모든 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JOY.T.D.#47기인 천해숙집사(현재 광주 월광교회 천성은 권사)및 JOY.T.D.#48기 준비위원장으로 봉사했던 본지 발행인(chj2315@paran.com)에게 뻬스까도르들의 소식 전하기를 환영합니다. <金容煥 대표기자>새감각 바른언론- 완도청해진www.wandonews.kr/ www.wandonews.co.kr입력:2000년 12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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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직면한 한국교회, “먼저는 기도다”위기 직면한 한국교회, “먼저는 기도다” 한기총, 25일 대학로 앞에서 ‘나라사랑 비상특별기도회’ ▲ 위기 직면한 한국교회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추위가 밀려와도 국난극복을 위한 한국교회 성도들의 기도 열정은 막을 수 없었다. 지난 4월25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엄신형 목사, 이하 한기총) 주최 ‘경제위기와 북핵위협 극복을 위한 한국교회 나라사랑 비상특별기도회’에는 수천여 성도들과 지도자들이 참석해 뜨겁게 기도했다. 한기총은 심각한 경제위기와 북한의 로켓 발사 및 핵개발 위협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대한민국의 위기 극복을 염원하며 이번 기도회를 준비했다. 이날 기도회에는 한국교회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으며, 성명서를 발표해 나라를 위해 힘을 모으고 기도할 것을 다짐했다. 특히 이날 기도회에는 최근 건강 악화로 인해 올해 공식 일정을 모두 취소한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참석해 격려사를 전했다. 조용기 목사는 이날 참석한 성도들에게 “나라의 현실이 지금 날씨와 같다. 경제는 파산하고 국민들은 분열하고 있으며, 남북은 대치 중”이라며 “이런 일들은 사람의 힘으론 해결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고 했다. 조 목사는 “어떻게 회개해야 하느냐”고 반문한 뒤, “교회가 첫사랑을 회복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건지실 것이다. 이 나라를 건질 힘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고 강조했다. 조용기 목사에 앞서 ‘터가 무너지면’(시 11:1~7)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전한 길자연 목사(한기총 명예회장) 역시 현재 우리나라가 직면한 어려움을 극복할 길은 기도밖에 없음을 역설했다. 길자연 목사는 “지금은 경제, 정치, 도덕, 양심 등 우리가 서 있던 모든 터가 무너진 상황”이라며 “이럴 때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만이 대안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성명서를 발표해 현 시국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성명은 국회와 정치권이 당리당략을 떠나 민생을 돌볼 것과, 정부가 사회안정망 확충과 노사 지원정책을 조기 집행할 것, 노사가 고통분담을 실천할 것, 북한이 평화 위협을 중단하고 6자회담에 복귀할 것, 한국교회가 사랑 실천에 앞장서고 기도할 것 등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날 기도회는 이용규 목사(한기총 명예회장)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백병도 목사(예성 총회장)와 최병남 목사(예장 합동 총회장), 정금출 장로(한기총 공동회장)가 각각 ‘국민화합과 나라사랑과 정치안정을 위하여’, ‘경제 살리기와 기부와 나눔 확산을 위하여’, ‘북핵 폐기와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하여’ 특별기도를 인도했다. 성도들은 모두 비바람을 무릅쓰고 뜨겁게 기도했다. 이날 기도회는 애국가 제창에 이은 박종순 목사(한기총 명예회장)의 축도로 마무리됐다. 한편 한기총은 이번 기도회 헌금 전액을 실직자와 노숙자를 위해 사용할 계획이다.<크리스천투데이> 새감각 바른언론-완도청해진www.wandonews.kr입력:20090429-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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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목포극동방송컵 교회대항 배구대회제2회 목포극동방송컵 교회대항 배구대회 사진> 완도읍 농어민 문화체육센터에서 3월 21일 제2회 교회대항 극동방송컵 배구대회가 목포극동방송국 완도군운영위원회(회장 정완봉) 주관으로 김성휘 방송국 지사장과 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개최되었다. 김동현 총무 사회로 완도군기독교연합회장 송광현목사의 설교로 시작해 예선리그와 결선리그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날 박종남 직전회장에게 김성휘 방송국 사장님 공로패가 수여되었다. 순수익금은 전원 선교비로 사용하기 때문에 부상금 없는 경기지만 경기 내용은 매우 알차고 치열했다. 참가교회는 원동교회, 성광교회, 주사랑교회, 안디옥교회, 제일교회, 그리고 완도군목회자연합팀이다. 이날 수준높은 제일교회와 원동교회의 결승전은 매우스릴있 경기와 재미있는 응원전으로 정말 멋진 한판 승부로 우승은 작년에 이어 원동교회가 2연승을 했다. 준우승 제일교회, 3위는 안디옥교회가 수상했다. 내년부터는 팀평준화를 위해 용병선수 2명 한도내에서 도입문제를 허락하는 방법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원동교회는 군외면소재지 장관선목사 담임교회로 노회의 각종스포츠를 비롯해 모든 경기는 늘 우승후보 대열에 오른 스포츠선교회가 잘된 교회로 평가 받았다. 이날 우승은 겨울기간동안 운동부족으로 강진중앙교회와 강진작전팀과 치밀한 교환 전지훈련을 통해 이룩한 우승으로 교회가 힘차게 하나로 단결한 응원한 힘이다. 끝으로 완도제일교회 김민호 담임목사의 마침기도로 모든 시상식을 마쳤다. <목포극동방송국 완도군운영위원회> 새감각 바른언론-완도청해진 www.wandonews.kr입력:200903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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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칼럼-복만 강조하는 값싼 복음이냐&회개를 동반한 십자가 복음이냐청해진칼럼 복만 강조하는 값싼 복음이냐? 회개를 동반한 십자가 복음이냐? ▲ 서해식 도민편집장 잘될겁니다. 좋은일이 많이 있을것입니다. 복많이 받으십시오 모두가 좋아하는 덕담임에 틀림없습니다. 각교회 강단마다 듣기좋은 상찬의 말씀들이 흘러넘칩니다. 보수교단 강단이고 진보교단 강단이고를 막론하고 축복이 이시대 신앙생활의 화두인 듯 합니다. 출세와 성공이 생의 목표가 돼있고 부흥회나 각종기도 모임도성공과 출세와 축복이 주제가 된 듯 합니다. 세속과 교회의 경계가 무너지고 황금우상이 하나님을 대신한 자리에 있기도합니다. 이른바 기독교국가라는 미국이 자본주의의 최대보루로써 뉴욕발 금융시장 붕괴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보여집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금송아지 맘몬을 섬긴것이 아니었을까요 성도덕이 붕괴되고 이혼률이 50%가 넘은나라가 청교도를 조상으로둔 미국입니다. 미혼모가 1200만이 되는나라 마약이 중고등학교까지 확산된 나라, 개인총기 휴대로 년간 12,000명이 총기사고로 희생된 나라, 폭력이 난무하고 포르노산업이 번창한나라, 도박을 부추킨 나라, 야간에 길거리에 나갈수 없는 나라, 이 나라가 소위 기독교 국가랍니다. 우리나라도 교회수가 5만7천여개고 신자가 어림잡아 1천만이라 합니다. 교회는 성장만 하면 되니까! 부도덕 하다해도 몰염치 하다해도 헌금 많이 나오고 건물이 크고 사람숫자 많으면 최고랍니다. 성경이 말한 음녀 바벨론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합니다. 공중나팔불때 들리워 올라가는 것을 휴거라고 부르더라고요, 종말이 오고 주님이 공중 재림한다면 건물이 구원받아 올라 갈까요. 멋진 세단이 올라 갈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견고한 예루살렘성전도 돌에 돌하나 겹치지 않고 무너져 내렸어요. 주후70년 티터스장군이 이끈 로마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예언이 들어 맞았지요. 교회당이 주님의 몸이었다면 북한의 교회당은 다 파괴 되거나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면 무어라 말할까요. 기독교국가였던 터키가 십자군전쟁 때 이슬람군대에 패해 교회당의 십자가는 떼어지고 이슬람사원으로 바뀐 것을 무어라고 말할까요, 성경에 기록된 일곱교회도 터만 남아 있는지는 몰라도 무너지고 없습니다. 고전3장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신줄 알지 못하느냐 로마서 8장9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20절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3절에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에배소서 2장8절9절에는 너희가 그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했습니다. 이로 보건데 하나님은 각자의 생명에 관심하시고 개개인의 생명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건물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영안에 거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고 고난없는 영광이 없다고 합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이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탄식하며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했을 때 주님의 권능이 임했습니다. 죽어야살고 내려 놓아야 채워주시는 주님이신데 지금교회에서는 회개 거듭남이 없는 신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축복 받으라고 외쳐됩니다. 이방종교는 죄와 회개 상관없이 복이 목적이지만 기독교는 회개와 십자가 고난 등이 강단에서 강론해야할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각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주님이 말씀하셨거든요. 요즈음 강단에 성공사례가 히트를 치고 헌금 많이 한 신자가 일등 신자입니다. 사회에서 빛과 소금 역할 안해도 교회생활만 잘하면 된다고 합니다. 인본주의로 덧칠한 값싼 복음을 복음의 핵심인양 속이는 일들일랑 버리고 가야할 유산 입니다. 구약의 율법주의로 신자를 오도하고 구약의 물질적 축복관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한 이질적인 복음을 계속해 갈 겁니까! 신약은 버려야한다고 죽어야한다고 분토와 같이 배설물같이 여겨야한다고 강조하고 영적이고 내적인면에 관심하고 있는데 예수그리스도 중심인 신약보다는 너무 구약중심의 설교가 난무합니다. 전쟁이야기 정복한 이야기 등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신약은 남을 위해 목숨도 버리라했는데 성공 지상주의는 남을 밟아야 되고 이겨야 되고 정복해야합니다. 예수님 말씀과 헷갈릴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유태교 이슬람교를 싸움의 종교라 하는가 봅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고 아가페사랑이 율법의 완성 아닌가요. 예수를 십자가에 넘기고 신약을 정경으로 부정하고 예수님을 지금도 구주로 거부한 유대인이 지금도 선택된 민족이고 그들의 기도를 들어 주실까요. 예수님 외에는 길이 없고 예수님에게 기도해야 들어 주신다고 했거든요. 유대인들은 지금도 다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구약을 그리 좋아하면 유대인이 된다고요, 중동 주변국가와 전쟁을 자주하고 여호와 이름을 들이대던가요,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면서 서로 사랑하라 했거든요. 구약으로 갔다. 신약으로 갔다 하니까 목사님들도 헷 갈린다고요. 성육신하신 예수님마음을 닮아야합니다. 예수님도 구약을 인용 하곤 했지만 구약이 제시한 메시아가 자신 인 것을 증명하고자 함이었거든요, 예수님을 통해서만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하면서 예수님 없이 믿는 하나님도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면 이슬람의 알라 하나님도 같은 하나님이겠네요. 우리는 성육신하신 성자 예수로인해 이방인 이지만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고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 없는 구원은 허위라는 거죠, 그러면 자연스레 신약의 예수를 주목하게 되고 신약의 중심말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겠지만 말이죠. 유대인들이 지금도 십계명을 잘 지킨다고 해서 인정 받을까요. 유대인들의 성공사례를 하나님 잘 믿어서 복 받아서 그런다고 설교하시면 예수님은 헛되이 죽으셨습니다. 제발 하나님 잘 믿어서 부자나라 되었다는 설교는 그만 하십시요! 안 믿는 나라도 잘 살수있고 오히려 부자가 되더니 하나님을 떠난 나라들이 많더라고요. 유럽이 탈기독교시대로 가고 있쟎아요. 이젠 진실하자고요. 정의롭게 올바르게 사는 것이 값진 삶이라고 강론 하자구요. 사회가 교회를 개혁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사회를 향해 사람답게 사는 법을 보여주자고요! 요지경속 세상이 된 것은 교회도 책임이 없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구조악과 맞서는 개혁자로 비쳐져 기득권층의 비토대상이 아니었던가요! 요즈음 “일부 성공했다는 성직자들이 기득권층에 붙어 서민들 한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친미 찬미가만 부르는 뉴라이트의 동굴의 우상에 빠져있지나 않는지” 자못 궁금하답니다. 제발 십자가신앙을 회복하고 회개와 거듭남과 예수님 닮아가는 삶에 승부를 걸었으면 합니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주님의 교회로 지향점을 삼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서해식 도민편집장새감각 바른언론-완도청해진 www.wandonews.kr입력:2009021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