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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길을 묻다-상
이원화(청해진완도 금일출신, 소설가)
2008년 02월 23일 (토) 21:50:09 청해진신문 webmaster@wandonews.kr

<단편소설>
                    길을 묻다

                   이 원 화(38, 금일출신, 소설가)

 
   
▲ 이원화 소설가

  지난 2006년1월1일 광주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길을 묻다” 당선자 이원화 씨는 전남 완도군 금일읍 출신으로 본지의 요청에 따라 신춘문예당선작 단편소설을 고향신문인 청해진신문 연재에
흔쾌히 승낙하며 당선소감을 말했다.

친구와 함께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전화를
받았다.
눈 때문에 버스가 자주 오지 않아서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이 50여명 쯤 되었을까. 친구에게 신문사래! 라고 말했더니, 친구가 먼저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길거리에서 둘이 안고 한참 소리를 지르다가 이러다 파출소에 끌려가겠다며, 웃었다.

지금 목이 잠겨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 때 지른 소리 때문인지, 감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전화를 받는 순간, 주위 분들께 고맙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여기에 고마운 분들의 이름을 다 적기엔, 원고지 네 장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 동안 지켜봐 주시고, 격려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늘 내 인생의 가장 큰 보너스라고 생각하는 아들 최유민이와 딸 최선다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소설 쓴다는 핑계로 아이들이 가장 큰 짐을 나누어진 것 같기 때문이다. 오늘이 있게 한 남편 앞에서 이젠 울 수 있을 것 같다.
더불어 남편과 함께 한 시간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날들이었다고, 사랑한다고, 가만히 남편의 이름을 불러본다.
길을 열어주신 윤대녕 선생님, 공지영 선생님, 이만큼 키워주신 채희윤 선생님, 용매 언니를 비롯한 아름다운 도반(친구), 언니들께 깊이깊이 감사드린다. 푸른 파도 일렁이는 고향 바다가 보고 싶다. <200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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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길을 묻다(상)      -이원화

내 안에서, 또 다른 내가 소리친다. 뭔가 써야 한다고, 쓰지 않으면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다고. 아니다. 쓰는 걸 놓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 왼손의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전기가 흐르는 듯 저리면서 먹먹하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맞잡고 주물러 보다가 손바닥을 펴고 찬찬히 들여다본다. 감각이 이상한 손가락이나 그렇지 않은 손가락이나 겉모양엔 차이가 없다.

창밖으로 보이는 공원의 풍경이 무성영화를 보는 듯하다. 공원 광장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의 양쪽으로 벌린 팔이 마치 새가 날 듯 자유롭다. 아마 데이트 중인 모양이다. 서로 손을 잡은 남자와 여자가 엉거주춤 허리를 구부린 채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있다. 자꾸만 미끄러지려는 여자를 안아 세우며 남자는 다리에 힘을 주겠지. 여자는 넘어지면서도 웃음을 날릴 것이다. 웃음이 꽃잎처럼 바람에 날리는 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속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보이는 날, 나는 컴퓨터 앞에 멍하니 앉아 뻐꾸기 울음소리를 듣고 있다.

컴퓨터의 본체에서 나는 윙윙거리는 소리와 수족관에서 들리는 도랑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뻐꾸기는 문을 닫고 들어갔고, 잣열매 모양의 시계추는 한없이 흔들거리며 시간이 흐르고 있다. 컴퓨터 앞에 마냥 앉아있는 사이 공원 주차장엔 차가 한 대 두 대 늘어나더니 금세 넓은 주차장이 가득 찼다. 주차요원의 호루라기 소리가 이명처럼 들린다. 아마 아파트 주차장에서는 차들이 한 대 두 대 빠져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연휴까지 끼어있는 이번 주말,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도착한 여행지에 하루치의 짐을 풀고 몸도 마음도 쉬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자동차의 창문을 열면 바삭바삭 마른 흙이 곧 눈으로 들어올 것 같았다.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의 발신 번호를 확인 한 김 기자가 핸드폰을 그냥 내려놨다.
“그냥 받아요. 저는, 상관없잖아요.”
서너 달 전 부서의 소속이 바뀌면서 담당 출입처가 바뀌어 알게 된 입사 십년 차의 기자였다. 시끄러운 벨소리 때문에라도 그가 전화를 받았으면 싶었다. 그에게선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이 느껴졌다. 동행의 불편함 때문일 것이다. 출장길에 동승하게 된 업무상의 관계.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관계. 마른 흙처럼 서걱거리다가 일이 끝나고 나면 산뜻하게 각 자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관계.

내가 일하는, 민간단체의 출입 기자와 ‘백제문화체험’ 현장에 가고 있다. 민트향이 느껴지는 가벼운 캐주얼 차림인 그에게서 예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창밖은 가을인데, 그에게선 봄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무슨 일이든 다시 시작 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곳곳의 카메라를 의식했다. 속도위반 단속 카메라에 나란히 얼굴이 찍혀 나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란히 앉아 사진에 찍히는 순간 조수석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되는 사회적 방식에서 느껴지는, 투명함이 아닌 불신의 느낌. 그 느낌이 싫었다. 속도위반 단속 카메라의 센서의 반짝임이 아닌 생의 순간순간들을 반짝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매월 제 날짜에 정확하게 지급되는 급여일까. 밀린 급여가 언제 나오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삶이 좀 더 명확하고 명쾌해질까.

선명한 빛깔의 은행잎과 단풍잎 가득한 고속도로 변 풍경들이 새로웠다. 풍경 속에서 나무들은 계절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니다. 풍경을 이루는 나무들은 제 각각 물관의 피돌기 속도를 조절하며 스스로 잎을 떨구어 내어 정리가 아닌 새로운 계절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년 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오르내렸던 길인데도, 머릿속에 풍경의 기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길이었다. 내 마음에 버석거림으로 남은 길. 이 길이 끝나고 나면 길의 위치가 분명해질까. 길이었다고, 막다른 길이 아닌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고 이름 지어질 수 있을까. 역사에 묻혀 버린 백제를 찾아가는 길. 죽은 자들을 땅 속에 꼭꼭 묻는 순간 기억도 그렇게 묻어버릴 수 있다면, 산 자들이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 땅 속에 그들을 꼭꼭 묻는 순간 남은 자들의 삶도 함께 묻혀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인용 병실의 왼쪽 침대에 남편의 자리를 만들었다. 끊임없이 고통을 호소하는 남편의 손을 붙잡고, 점점 흐려가는 남편의 눈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해 줄까?”
“추워.”
남편은 끝없이 추위를 호소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한 여름인데, 남편은 혈액의 수치가 떨어지면서 나타나는 추위에 더욱 고통스러워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한꺼번에 서너 팩의 수혈을 받아야 했다.

“저거 폭탄, 폭탄이 곧 터질 것 같아. 저거 좀 어떻게 해 줘.”
링거 거치대에 매달린, 혈압기의 원리로 압력을 가해 공기를 넣어 혈액팩을 누르는 둥그런 모양의 고무로 된 기구로, 혈액팩에서 혈액이 잘 흘러나오도록 하기 위해 설치한 보조 기구를 남편은 폭탄이라며 불안해했다.

폭탄. 허공에 매달린 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안전핀 뽑힌 폭탄. 남편 자신에 대한 위치설명은 아니었을까? 하루하루 입원 날짜는 늘어가는데, 자신의 몸에선 자꾸만 힘이 빠져나가는 이상한 날들. 오늘밤이 지나면 힘이 좀 나겠지. 내일은 좋아지겠지. 그렇게 스스로 자위하며 보낸 시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저 딸아이를 두고……. 좋아지겠지. 의지만 있다면 살아야 해. 그렇게 남편은 힘을 얻으려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다시 수혈을 하자는 의사에게 물었다.
“혹시 내 욕심 때문에 그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아닌가요? 수혈로 오히려 생명을 연장해서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거라면 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치료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몸 상태를 좀 더 좋게 하기 때문에 환자에게 충분히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럼 기다려야하는 건가요? 무작정……. 뭘 기다리죠?”
남편은 활짝 피었다가 스러져가는 한 송이 꽃이었다. 꽃이 아름다건 꽃이 필 수 있는 희망이 있었고, 스스로의 힘으로 꽃을 피워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그 꽃에 생명이 있는 때문일 것이다. 남편은 사랑이라는 마술에 최면이 걸려 자신의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워 내고, 그 정점에서 스러져가는 자신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난 결혼 생활동안 내가 남편의 진기를 다 뽑아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생명은 있으나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자신의 의지로는 몸을 돌려 누울 수도 없는 상태의 남편이었다.

스스로는 한 걸음도 뗄 수 없는 남편을 휠체어에 태우고 병실을 나섰다. 따스한 햇볕이라도 쪼이고 나면 곧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 모자를 씌우고, 담요를 덮어 발아래 햇볕이 따스한 곳에 휠체어를 세웠다. 미동도 없이 앉아있는 남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통통해서 손으로 만지면 매끈한 느낌이 너무 좋던 볼은 움푹 패었고, 반짝반짝 윤이 나던 얼굴은 푸르스름하게 변해있었다. 저 얼굴이, 불과 몇 달 전까지도 울퉁불퉁하던 어깨근육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 추위와 아픔을 호소하는 저 사람이 남편이 맞을까. 이해할 수 없었다.

집결지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동행한 김 기자 뿐, 대다수가 칠팔십 세가 넘은 할아버지들이었다. 할아버지들을 보면서 남편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겨우 절반 살고 가다니……. 남편은 뭔가. 남편은 잘 있을 거라고, 애써 나 자신을 다독였다.

백제 시대의 벽화를 볼 수 있는 능산리 고분군에 들렀다. 울타리처럼 둘러쳐진 금은화로도 불리는 인동초 덩굴을 보았다. 백제 지역에서 출토 또는 발견되는 유물들에서 보여주는 왕과 왕비, 6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머리에 쓰는 관에 꽂았다는 인동꽃 무늬의 장식품들이 가을 햇살 아래 피어난 인동꽃과 잘 비교되었다.

왕은 금색의 꽂이를 머리 양쪽 귀 위에 꽂았는지, 앞뒤로 꽂았는지 아니면 앞면에 사선으로 꽂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금도금인 것만은 분명하고, 벼슬아치들은 하나의 은꽂이를 이마 정 중앙에 꽂았다. 왕과 왕비가 금도금 꽂이를, 6품 이상 벼슬아치 부부들은 은꽂이를 꽂은 모습은 먼 옛날 백제에서도 아내는 남편의 출세여부에 따라 그 신분이 구분되는 것으로 보였다.

“이 카드, 정지됐는데요.”
어느 날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고 신용카드를 내밀었을 때, 카드체크기에서 확인을 한 종업원이 말했다. 아뇨. 그럴 리가, 연체된 것도 없는데…….

카드사에 확인 전화를 했을 때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상담원의 기계적인 답변에 또다시 절망했다. 금융감독원을 통해 남편의 사망사실이 카드사에 통보되었고 카드가 정지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번쯤 카드 명의자에게 통보는 해 줘야하지 않았을까.

바다 속 물고기의 알까지도 모조리 건져 올릴 수 있는 저인망 그물처럼 빈틈없이 연결된 전산망에 의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카드가 정지되고, 미망인이라는 꼬리표를 다시 확인했다.

흐르는 시간을 이기지 못해 삭아 없어지고 약탈당하고 도굴당하고…….
그 희소성 때문에 더욱 가치를 지니는 물건들. 어느 한 때 후원을 거니는 왕과 왕비의 권위를 더욱 높여줬을 여러 장식품들. 마흔네 명의 자식을 거느린 의자왕은 당나라로 끌려가 소정방에게 치욕적 수모를 당했다고 하니, 영욕의 세월 뒤의 무상함은 또 뭔가. 끌려간 뒤 달포 만에 그 숨을 놓은 의자왕이 묻혀 있다는 북망산. 지금 남편은 어디쯤 있을까.

남편은 편안할까. 숨을 놓은 그 순간 남편의 고통은 사라졌을까. 더 이상 뼈마디를 만져주지 않아도, 마약성 진통제가 없어도 괜찮을까. 문 밖이 죽음이라고? 아니다. 삶과 죽음은 늘 한자리에 있다. 서 있는 그 자리에 삶도 죽음도 함께 있다.

벽과 천장 등 삼면에 사신도와 연화당초문양 등 채색벽화를 재현 해 둔 모형 전시관에서 한 뼘 정도의 크기로 늘어선 정사각형 화강암 관 받침대를 보았다. 산 자들의 기준에 맞춘 죽은 자들의 집에 들어가 벽화를 구경하고, 구석진 천장을 차지하고 거꾸로 매달린 귀뚜라미들을 보았다.

무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들이었다. 남의 집에 들어와 천연덕스럽게 자리를 차지한 귀뚜라미들. 누가 진짜 주인일까. 죽었으므로 무덤의 주인이 되었을 테지만, 죽었으므로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면 그 자연의 진짜 주인은 생명을 지닌 귀뚜라미들이다.

광물질로 채색한 벽화의 아름다운 문양과 그 색에 감탄하면서 산 자와 죽은 자가 구별되지 않은 느낌 때문에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졌다. 초대받지 않은 남의 집을 훔쳐보는 느낌이었다. 산 자들이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 무덤이라면 죽음이 구경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먼저 집에 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나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왔다.
남편을 뒤로하고 장농문을 열며 기억을 헤집었다. 무슨 일이지? 자켓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스커트 후크를 열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푸는 나를 향해,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편으론 떨리는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일 병원에 좀 가봐야 할까봐.”
순간 오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한 달이 넘도록 자리에 누워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하면서도 쉬지 않고 검은 물을 토해내던 시어머니. 단추를 풀던 손가락을 멈췄다. 단추를 풀어내던 손가락을 멈추고 짧게 뒤돌아보았을 때, 남편은 한 쪽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내 고개를 돌리고 심상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허락을 기다리듯, 소풍을 가려는데 엄마가 따라오는지 아닌지 확인하듯 남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모른 척 아무것도 못 본 척 단추를 풀던 내 가슴속에서 뭔가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 동안 건강검진을 받아보자고 늘 말해도 안 듣더니……. 덜덜 떨리는 손가락의 떨림을 애써 감춘 채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더운물에서 찬물로, 찬물에서 더운물로를 여러 번 반복하도록 서 있었다. 그렇게 서 있는 동안 새벽안개처럼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늘 다니던 길인데도 한치 앞도 알 수 없도록 짙은 안개. 한 발만 내딛으면 낭떠러지일 것 같은 안개 속에서 손을 내저어 흐릿한 거울을 닦아냈다.

더운 물줄기에서 피어난 안개로 거울은 이내 부옇게 흐려져 실루엣을 지워버렸다.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에 몸을 내맡긴 채 마치 할 일이 그 뿐인 양 서 있었다. 오래도록 샤워를 하고 나면 머릿속까지 맑아져 병원에 가는 일 따윈 까맣게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가 맞부딪치며 몸이 떨려올 때쯤 타월을 두르고 나와 남편 곁에 누웠다. 남편의 얼굴이 창문에 든 달빛에 젖어 흐릿하게 보였다. 남편의 고개를 들어 팔에 올리고 꼭 안았다가 내려놓은 뒤 천천히 남편의 몸을 더듬었다. 아침에 면도를 한 까실까실한 수염이 자라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안고 긴 입맞춤을 했다. 이두박근 삼두박근하며 만지고 장난치던, 운동으로 잘 다져진 근육질의 어깨를 안고 깊숙이 남편을 받아들였다.

“내가 당신 사랑하는 거 알지? 오래오래 곁에 있을 꺼지? 난 당신 없으면 못 사는 거 알지?”
남편을 안으며 마치 다짐을 받듯 물었다. 남편을 향한 그 물음들이 나 자신을 향한 물음들이기도 했다. 지난 결혼 생활동안 내내 한 순간도 잊지 않고 남편을 사랑했는가? 지금까지 남편의 그늘 속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저 부부라는 이름으로 의무처럼, 당연한 것처럼 살아오지 않았나,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피검사와 초음파 검사 등 간단한 몇 개의 검사를 마치고 다시 진료실에 들어갔을 때 좋은 결과에 만족한다는 듯 반말투로 의사가 말했다.

“무지하게 건강하구만. 위내시경 검사나 한 번 해봅시다.”
성실납세 대통령 표창장과 온갖 골프시합 수상 컵으로 진료실 전부를 장식 해 놓은 의사를 의사로 보이게 한 것은 벽면에 걸린 사진이 붙은 의사면허증이 전부였다.

수면 내시경 검사로 남편은 잠시 잠이 들었다. 개인 병원인 때문인지 검사실에서 남편의 위상태를 직접 볼 수 있었다. 긴 검사용 내선이 식도를 지나 위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보았다. 선홍색이어야 할 남편의 위는 마치 개펄 같았다. 육지에서 밀려온 개흙에 덮여 썩어가는 개펄. 바지락도 게도 지렁이도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개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썩은 냄새가 날 것 같은 개펄.

“그 동안 건강 진단 받지 않으셨나요? 위암입니다. 지금 당장 수술은 어렵군요. 경과를 지켜본 다음에 수술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죠. 무엇보다 본인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내시경 검사 전 반은 농담처럼 건강을 장담하던 의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을 하고 말했다. 조직 검사 결과를 기다리지 않아도 확연하게 알 수 있을 만큼 남편의 병은 깊게 진행되어 있었다.
어떻게, 얼마만큼 나쁘다는 설명도 없이 의사는 수술도 안된다고 했다. 오히려 지금 개복을 하는 경우 더 나빠질 수 있다고 했다. 수술 중 사망으로 다시 깨어날 수 없다고도 했다. 나는 절망했다. 의사의 설명 때문이 아니라, 내 눈으로 직접 본 남편의 개펄 같은 위 상태 때문에, 나는 절망했다.

“어떻던가?”
위내시경 검사의 상태를 묻는 남편에게 고개를 돌린 채 아무렇지도 않는 듯 말했다.
“위에 문제가 좀 있나봐. 지금 수술하는 것보다 좀 더 지켜보자네. 약물로도 치료가 가능하데.”
나는 수술도 할 수 없을 만큼 나쁘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수술보다 약물치료 효과가 더 빠르다는 쪽으로 남편에게 전했다. 한껏 밝은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고, 화장실에 가 펑펑 울었다.
“우리 이쁜이를 위해서라도 살아야지.”

남편은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었을까? 병원 문을 나서며 중얼거린 남편의 첫마디였다. 서른 넘어 결혼해서 얻은 아들과 딸. 이름 대신 늘 이쁜이로 부르는 딸.

세상에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을 예쁜 딸.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인 딸. 어쩌면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자란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딸아이 때문에라도 살아야한다고 말하는 남편의 손을 꼭 잡았다.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으면 언제까지라도 내 곁에 남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속>

입력 07103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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