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7 (화)

  • 구름많음속초9.3℃
  • 흐림11.9℃
  • 흐림철원11.8℃
  • 흐림동두천12.3℃
  • 흐림파주12.2℃
  • 흐림대관령5.4℃
  • 흐림춘천12.0℃
  • 흐림백령도11.8℃
  • 구름조금북강릉10.0℃
  • 구름많음강릉10.8℃
  • 흐림동해10.2℃
  • 흐림서울13.3℃
  • 흐림인천13.1℃
  • 흐림원주13.6℃
  • 구름많음울릉도9.8℃
  • 비수원11.8℃
  • 흐림영월12.2℃
  • 흐림충주13.1℃
  • 흐림서산12.1℃
  • 흐림울진10.9℃
  • 비청주12.6℃
  • 비대전11.7℃
  • 흐림추풍령10.3℃
  • 비안동10.8℃
  • 흐림상주10.8℃
  • 비포항12.0℃
  • 흐림군산13.5℃
  • 비대구11.1℃
  • 비전주13.8℃
  • 비울산11.3℃
  • 비창원13.2℃
  • 흐림광주14.1℃
  • 비부산12.0℃
  • 흐림통영12.8℃
  • 비목포13.8℃
  • 비여수14.3℃
  • 흐림흑산도12.8℃
  • 흐림완도14.7℃
  • 흐림고창13.0℃
  • 흐림순천12.7℃
  • 비홍성(예)12.6℃
  • 흐림11.3℃
  • 구름많음제주16.4℃
  • 맑음고산15.0℃
  • 맑음성산15.5℃
  • 맑음서귀포16.4℃
  • 흐림진주12.5℃
  • 흐림강화13.4℃
  • 흐림양평13.8℃
  • 흐림이천12.1℃
  • 구름많음인제10.5℃
  • 흐림홍천11.2℃
  • 흐림태백6.7℃
  • 흐림정선군9.7℃
  • 흐림제천11.4℃
  • 흐림보은11.3℃
  • 흐림천안12.5℃
  • 흐림보령12.3℃
  • 흐림부여12.3℃
  • 흐림금산11.7℃
  • 흐림11.9℃
  • 흐림부안14.2℃
  • 흐림임실13.4℃
  • 흐림정읍13.5℃
  • 흐림남원13.6℃
  • 흐림장수11.5℃
  • 흐림고창군13.3℃
  • 흐림영광군13.3℃
  • 흐림김해시12.0℃
  • 흐림순창군13.6℃
  • 흐림북창원12.7℃
  • 흐림양산시12.6℃
  • 흐림보성군15.5℃
  • 구름많음강진군14.5℃
  • 구름많음장흥14.6℃
  • 흐림해남14.4℃
  • 흐림고흥15.4℃
  • 흐림의령군12.3℃
  • 흐림함양군12.1℃
  • 흐림광양시14.9℃
  • 흐림진도군14.0℃
  • 흐림봉화11.8℃
  • 흐림영주11.1℃
  • 흐림문경10.9℃
  • 흐림청송군10.2℃
  • 흐림영덕11.3℃
  • 흐림의성11.4℃
  • 흐림구미11.5℃
  • 흐림영천11.3℃
  • 흐림경주시11.2℃
  • 흐림거창10.4℃
  • 흐림합천11.8℃
  • 흐림밀양12.3℃
  • 흐림산청11.9℃
  • 흐림거제12.9℃
  • 흐림남해14.2℃
  • 흐림12.9℃
청해진(淸海鎭)시대 정년장군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해진(淸海鎭)시대 정년장군

장보고의 뒤를 이어 계속 청해진 대사

[청해진농수산경제신문] 정년(鄭年)은 통일신라 말기의 무신으로 궁복(장보고)와 함께 청해진(완도)를 지켰다. 
 
   
장보고(張保皐)와 정년은 다 싸움을 잘했는데 정년(鄭年)은 바다 밑에 잠겨서 50리를 가도 숨이 막히지 않다는 전설적인 사람이었다
그 용감하고 씩씩함을 견주자면 장보고가 못하였으나 정년이 장보고를 兄으로 불렀다.

장보고는 나이로, 정년은 재주로 항상 맞서 서로 낮추지 않았다.
그때부터 완도사람들 물속길 50리를 끼우는 존재로 육지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정년은 장보고(張保皐)와 함께 당나라(唐)에 건너갔다
당나라에서 정년과 장보고는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었는데 말타고 창을 쓰는 데 있어서 맞설 자가없었다.
 
그들은 해적에게 납치되어 당나라에서 고생하고 있는 신라사람들을 석방 시키는데 기여 하였다.
 
당시 황해에서 날뛰던 해적들로 부터 모국 신라(新羅)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것을 보고 장보고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신라 조정을 설득, 전남 완도의 청해진(靑海鎭)을 근거로 해적들을 소탕하고
서해, 남해항로의 무역권을 독점하게 되자 정년장군도 뒤따라 귀국, 장보고를 도왔다.
 
귀국 후 흥덕왕조에 출사하여 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정년은 본관이 경주이고 신라의 개국공신 지백호의 후손으로, 어린시설 궁복이(장보고)와 함께 청해진 완도에서 살았다 .
 
그는 청해진에 몸을 의탁한 아찬(阿燦) 김우징을 받들었고. 838년(민애왕 2) 장보고(張保皐)의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아찬 김우징(金佑徵: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 김명(金明)의 관군을 무찌르고 신무왕(新武王)을 세우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장보고의 자녀가 문성왕과의 결혼 문제로, 문성왕이 보낸 자객 염장에게 장보고가 암살되자
이후 혼란에 빠진 청해진(淸海鎭)을 수습하고 장보고의 뒤를 이어 계속 청해진 대사로서 청해진을 지켰다.
장보고장군의 정치력과 정년장군의 무술로서 둘이가 하나되면 언제나 무적이 되었다고 한다.<서부 정완봉기자>

새감각 바른언론-청해진농수산경제신문www.chjnews.kr
입력160322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